잘 클 거야

Part 1. ep 10. 잊지 말 것

by 오엉

영어선생님. 그분은 전문상담교사도 아니고, 나와 같은 학년 소속도 아니었다. 그냥 가끔 상담실에 들르시는 분. 근데 이상하게도 내가 힘들 때마다 오셔서 깨달음을 주고 가시는 멘토셨다. 아니면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였나.


그날도 그랬다.


학부모 상담이 쌓여 있었고 심리검사 해석도 밀려 있었다. 자해하는 아이, 아동학대 의심 아이, 학교 오기 싫다는 아이. 머릿속이 복잡했다.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때 그분이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처음에는 '아 지금 바쁜데.' 싶었다. 그래서 맘이 좀 안 좋았다가, 별 얘기 없이 그냥 앉아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그분이 온화한 미소로 나를 쳐다보시는데, 아무 말씀도 없이 지긋이, 그러니까 갑자기 내가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근데 선생님.. 요즘.. 너무 힘들어요. 제가 애들한테 도움을 어디까지 줘야 할지 모르겠고, 제가 걔들한테 도움이 되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고. 잘하고 있는 건지 아닌 건지.. 도움을 주려고 하는 일들인데 그게 도움이 되는 건지 아닌 건지.. 그 애들의 집이나 부모를 바꿔줄 수도 없고 환경을 바꿔줄 수도 없는데 제가 상담한다고 애들이 좋아지기는 할런지.. 그냥 다 모르겠어요.."


그랬더니 그분이 본인 젊은 시절에 만났던 스님의 말씀을 전해주셨다.


"도움 준 것을 상대에게 확인하려 하지 말아라. 그것은 너의 욕심이고 집착이다."


그 말을 듣는데 할 말을 잃었다. 그분이 이어서 말씀하셨다.


"그냥 쌤의 도움이 걔의 마음의 힘을 조금이라도 키워줬다면, 아주 나중에라도 걔가 좀 더 잘 살 수 있지 않겠냐고. 뭐 그런 거지."


마음의 힘 키워주기. 내가 수험생 때부터 스케줄러에 적어두고 다녔던 말. 수만 가지 이유들로 척박해진 마음의 땅이 촉촉해질 수 있게 물 주고, 내가 없어도 혼자 살아갈 수 있게 마음의 힘 키워주기. 그게 목표였잖아. 내가 아이를 만나는 동안 싹 틔우고 꽃 피우는 게 목표가 아니었잖아.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됐다. 끄덕끄덕. 역시, 이분은 내 멘토가 맞다.


"네... 그래도 조금은 도움이 되겠죠...?"


그분이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걱정하지 마. 분명 잘 클 거야."


잘 클 거야.


그 네 글자가 주는 힘이 진짜 뭉클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서 영어선생님께서 휴지를 가져다주셨다.








그날 밤 자기 전에 그 대화가 계속 생각났다. 내가 하는 일들. 아이를 상담하고 심리검사하고 학부모를 만나고, 담임교사나 관리자들을 만나 아이의 학교 생활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논의하는 것. 학생 집에도 가고 병원에도 같이 가고 교육청 좋은 사업에 신청해서 치료비를 지원받고 하는 것들. 마음이 아픈 아이들을 도우려고 애쓰는 것들. 가끔은 그게 무용하게 느껴졌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건지. 이게 도움이 되긴 하는 건지. 상담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는 아이 뒷모습을 볼 때마다, 문득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분 말씀대로라면, 내가 확인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욕심이고 집착인 거다. 도움이 됐는지 안 됐는지, 그건 내가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이 시간이 그 아이한테 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면 되는 거다. 그냥 반갑게 맞이해 주는 것. 옆에 앉아서 고개를 끄덕거려 주는 것.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말해주는 것. 같이 그림 그리고, 같이 보드게임 하고, 같이 웃어주는 것. 거창한 게 아닌 그것들로, 마음의 힘이 조금이라도 자라면 되는 거다. 아주 나중에라도.


잘 클 거야.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부모가 없는 아이도, 학대받는 아이도, 집에 가기 싫은 아이도, 자해하는 아이도. 지금은 힘들어도, 아주 나중에라도, 잘 클 거라고. 내가 옆에서 고개 끄덕거리고 눈을 맞추고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그 시간들이 어딘가에 어떻게든 쌓여서, 언젠가 그 아이들이 또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버텨내야 할 때, 그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그 고난을 이겨내고 꽃 피우게 할 수 있을 거라고.


확인하려 하지 말자. 그건 욕심이고 집착이니까.


그냥 믿자. 잘 클 거라고.


그날 이후로 힘들 때마다 그 말을 떠올렸다. 멘토쌤이 건네준 주문 같은 말. 잊지 말자.


잘 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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