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ep 11. 메린
태초에 메린이가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그 애였기 때문에. 그러니까 메린이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메린이와는 그 애가 5학년이던 시절에 만났다. 내가 이 학교에 처음 발령받은 해, 가을쯤이었나 겨울쯤이었나. 상담으로 만나기 전에도 물론 그 애를 알고 있었다. 또래 여자아이들 중에서 키가 컸고, 언제나 여자아이들을 몰고 다녔고,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도 대장 노릇을 했다. 방과 후엔 늘 운동장에서 남자애들과 축구를 하고 있었는데, 퇴근길마다 그 애들이 축구를 하며 외쳤다.
"상담쌤! 안녕히 가세요!"
처음 보는 사람은 그 애가 남자인 줄 알 거다. 머리가 남자애들만큼 짧았으니까.
메린이요. 자기 입으로 그랬다. 이름은 혜린이면서. 자기 입으로도 애들 입으로도 메린이라고 불렀다. 김혜린을 소리 내서 말하면 기메린이라고. 자긴 메린이라고.
어떻게 상담을 시작하게 됐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자기 발로 왔는지, 친구들이 상담실로 들이밀었는지, 놀러 온 그 애한테 내가 상담하자고 했는지. 아무튼 우리는 상담을 하게 됐다.
걔가 자해를 했으니까.
죽고 싶다고 했다. 죽고 싶어서 자해를 한다고.
지난번 또래상담자 아현이가 자해를 고백한 뒤 두 번째로 마주하는 자해였다. 당연히 또 압도당했다. 내가 발령받은 첫해였고, 상담 실습 이후 진짜 상담을 시작한 첫해였다. 이론밖에 모르는 초심자였다. 정말 창피하게도.
상담실에서 메린이에게 비밀보장의 예외사항을 설명했다. 나는 너를 지키기 위해 부모님과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릴 의무가 있다고. 설득해도 메린이는 완강했다.
"절대 말하지 마세요."
"네가 동의해 줄 때까지 너 집에 못 보낸다."
"집 안 가도 상관없어요. 말하지 마세요."
"동의해 줘."
"동의 못 해요."
말씨름도 했다가, 다시 좋게 설득도 했다가, 나중엔 빌어보기도 했다. 메린이는 완강했다. 그러다가 퇴근 시간이 다가오니까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야 뭐 얘랑 밤새 여기 있어도 상관없는데, 담임선생님이랑 교감선생님이 퇴근하시기 전에 말씀드려야 될 거 아냐.
그 생각이 드니까 애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하자. 선생님은 말해야 돼. 너는 집에 가."
"말하기만 해 봐요. 말하면 다신 안 올 거예요."
그런 대화들을 하고 메린이를 보냈다.
보내고? 당연히 말했다. 담임선생님한테 보고하고, 교감선생님한테 보고하고, 메린이 엄마한테 전화해서 말씀드리고, 교육청 보고까지 했다. 물론 담임선생님께는 모른 척해달라고, 제가 상담하겠노라고 했다. 어머님께도 일단 모르는 척해주시라고.
근데 어떻게 알았는지 다 알더라.
그다음 날부터 메린이는 상담실에 안 왔다. 나는 찔렸지만 모르는 척했다. 그 애가 상담 오기로 한 요일 다음 날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말했다.
"너 어제 왜 상담 안 왔어."
물음도 아니었다. 그냥 의무적인 뱉음이었다. 메린이도 모르는 척했다.
"가기 싫어서요."
그런 말만 했다.
근데 그 겨울에, 5학년들이 자꾸 상담실에 와서 그런 말을 하더라.
"상담하면 엄마한테 다 말한다면서요?"
누가 상담을 신청하려고 하면 "야야야 하지 마, 상담하면 상담쌤이 엄마랑 담임한테 다 말한대!" 그렇게 말리기까지 했다.
망했다. 메린이다.
겨울방학이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나는 일단 올해 5학년 농사는 망했음을 받아들이고, 새 학기에 새로 씨를 뿌리기로 다짐했다. 그렇게 절치부심하고 새해를 맞이했다.
새 학기엔 전 학년 전 학급에 수업을 들어간다. 가서 상담에 대한 인식 개선과 상담실 홍보를 잠깐 하고, 응집력 향상 프로그램이나 자존감 향상 프로그램 같은 걸 했다. 비밀보장에 대해서도 다시 설명했다. 비밀보장의 예외사항도.
"작년에 선생님이 상담이 뭔지 알려줬지? 상담은 뭐다? 둘이서 이야기하는 거다~ 무슨 이야기? 마음 이야기~ 마음 이야기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게 뭐다? 비밀보장이다~ 왜? 상담선생님 말고는 그 누구도 내 얘기를 듣지 못할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가장 솔직하게 자기 마음 얘기를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이 비밀이 지켜지지 못할 때도 있다고 했지? 언제? 학교폭력, 아동학대, 자해를 했거나 자살에 대한 계획이 있거나 타인을 해칠 계획이 있을 때~ 기억하죠? 선생님은 여러분을 지키기 위해서! 여러분이 위험에 처해있거나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려고 할 때 보호자에게 알릴 의무가 있어요. 하지만 이 경우에도 여러분에게 동의를 반드시 구한 뒤 보호자나 담임선생님, 교장/교감선생님께 말씀드릴 거예요. 그리고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비밀을 지켜주니까 안심하고 고민을 말하러 오셔도 됩니다~?"
여기까지가 원래 멘트. 6학년 수업에서는 다른 학년과는 조금 다른 말을 추가했다.
"그런데 여러분. 6학년 친구들 앞에서 제가 고백할 것이 있어요."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요즘 6학년들 사이에서 '상담실에 가면 부모님이랑 담임선생님이 다 알게 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것 알아요. 고백하자면, 작년에 어떤 친구가 선생님하고 상담하는 중에 비밀보장 예외사항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했고, 그 아이가 동의하지 않았음에도 제가 담임선생님과 부모님께 그걸 말했어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을 이었다.
"그 친구는 아주 크게 배신감을 느꼈겠지. 작년의 그 일은 전적으로 제 잘못이 맞아요. 하지만 여러분께 그걸 사죄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려고 합니다. 한 번만 다시 믿어주면, 절대로 절대로 너희의 이야기를 동의 없이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지 않을게."
메린이가 있는 반에서, 맨 앞에 앉아있는 메린이를 앞에 두고 저 이야기를 할 때는 목이 메고 목소리가 다 떨렸다. 마지막에 "미안해."를 내뱉을 때는 거의 울 뻔했다.
27살 먹은 선생이 13살 애들 앞에서 공개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게, 진짜. 자존심 상하고, 쪽팔리고, 하기 싫었다. 근데 그래도 해야겠는 거였다. 쟤 마음을 돌려야겠는 거였다. 자해를 하잖아. 자해를 하고 죽고 싶다는 애가 상담을 안 오잖아. 나 때문에.
간절한 맘으로 공개사과를 했다. 메린이는 날 보지 않고 딴청을 피웠지만, 그날 이후로 다시 상담실에 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다시 상담실에 온 날, 얼마나 기쁘던지. 그동안 해왔던 긴장이 탁 풀리면서 너무 고맙다, 지난번에 수업 때 내가 한 말 들었냐, 다 너한테 하는 말이었다, 네가 다시 오기만을 기다렸다, 안 오면 어쩌나 너한테 따로 찾아가서 무릎 꿇어야 하나 생각했다, 다시 와줘서 너무너무 고맙다, 한참을 속사포로 쏟아냈던 것 같다.
걔가 그때 슬며시 웃었다. 이미 용서했다는 듯이. 앞으로 잘하라는 듯이.
그렇게 대장 학년의 대장, 메린이와의 상담이 시작됐다.
아프고도 괴로운 1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