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랄 줄 알았지?

Part 1. ep 14. 커플 탄생

by 오엉


메린이와 소진이의 무리에는 더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우정이, 윤아, 지연이, 혜리, 시현이. 스탠드에서 파우치를 교환하며 화장한다던 그 애들이다. 메린이는 우정이와 제일 친했고, 소진이는 윤아와 제일 친했다. 저번에 말한 학교 탈출도 윤아랑 같이 한 거였다.


그중에서도 우정이는 좀 특별한 아이였다. 되게 활발하고 야무졌다. 공부도 잘하고 놀기도 잘하는 아이랄까. 학교 학생회, 방송부, 도서부를 총망라하며 영향력과 리더십을 발산하는 애였다.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6학년 우정이"하면 다 알 정도로 존재감이 있었다. 동시에, 메린이와 함께 껄렁거리고 화장하고 방과 후에 거리를 배회하는 아이이기도 했다. 모범생과 날라리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애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애한테서 내 모습을 봤던 것 같기도 하다.


처음 상담실에도 우정이가 애들을 다 끌고 왔던 것 같다. 메린이만 끌고 왔나? 기억이 잘 안 난다. 아무튼 우정이도 상담을 신청해서 몇 번 상담을 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친구 관계나 진로 고민 같은 거였을 거다. 그 또래 아이들이 흔히 하는.


그러다가 어느 날, 우정이가 자기 상담 시간에 메린이를 달고 왔다.


"선생님, 저 상담할 때 메린이 같이 있으면 안 돼요?"


나는 안 된다고 했다. 너의 비밀스러운 얘기를 메린이가 들어도 괜찮겠냐고. 그리고 네가 괜찮다고 해도, 메린이가 네 비밀스러운 얘기를 듣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상담의 기본 원칙이다. 1:1. 비밀보장. 그게 깨지면 상담이 아니다.


그랬더니 괜찮다고 했다. 자기도 괜찮고 메린이도 괜찮을 거라고. 자기들은 서로의 모든 걸 안다고.


그래, 제일 친하잖아. 뭐든 공유하는 베프 사이인 거 안다. 그래도—


말을 이어가려고 했는데 우정이가 끊었다.


"제일 친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면?"


"저희 사귀어요."


그 말을 내뱉는 우정이의 얼굴이. 참 뭐랄까. 마치 자식의 서울대 합격 소식을 직장에도, 마트에도,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낯선 이웃에게도 알리고 싶어 드릉드릉하는 학부모의 얼굴이었달까. 떨리면서도 자랑스럽고, 인정받고 싶고, 그러면서도 혹시 반응이 안 좋으면 어쩌나 긴장되는 그런 얼굴.


옆으로 시선을 돌려 메린이를 바라봤다. 옅은 미소를 띠며 작게 끄덕끄덕. 얘는 또 무슨 클럽에서 존예 여신 번호 따고 친구가 "야, 성공했어?" 했을 때의 위풍당당함과 민망함을 한데 섞은 얼굴을 하고 있어. 평소에 그렇게 당당하고 씩씩하던 애가 볼이 살짝 빨개져 있었다.


웃기는 녀석들.

사귄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다. 어쩐지 요 며칠 계속 손을 잡고 다니더라. 원래 친하긴 했지만, 요즘 들어 유독 붙어 다닌다 싶었는데. 내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아, 그래? 사귀기로 했어?"


그제야 우정이가 조급한 얼굴을 띠며 말했다.


"요즘은 여자끼리도 사귀는 애들 많아요! 트위터에도 엄청 많아요!"


내가 이해를 못 할 줄 알았나 보다.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혹은 혼낼 줄 알았나 보다. 그래서 미리 방어선을 치는 거겠지. '요즘은 많아요'라는 말로.








요즘만이겠니.


선생님 이대 나온 여자야.

선생님 대학교 절친이 '변날' 출신이다 이거야.

변날이 뭔 줄이나 아니? '변태소녀 하늘을 날다' 줄임말로, 성소수자 동아리야.

대학교 절친도, 과 대표 언니도, 대학에서 만난 고등학교 선배도 다 레즈비언이었다 이 말이야.

그 시절 술자리에서 그네들 연애 상담도 숱하게 들어줬다.


대학교에서만 봤을까?


이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여중, 여고가 선생님 모교다 이 말이야.

그때도 숱한 커플 봤다.

쉬는 시간마다 손잡고 화장실 가고, 무릎에 앉아서 괜히 서로 쭈물딱거리고.

갑자기 분위기 냉랭해져서 따로 다니면 헤어졌나 보다고 학년 전체가 술렁이고.

그때는 얘들아, 시절이 엄했다?

커플 축출해 낸다고, 여자끼리 사귄답시고 붙어 다니고 진한 스킨십하고 그런 애들 다 적어내라는 익명 설문조사도 했어.

거기에 이름이 적혀 나오는 애들은 교무실로 불려 갔다 얘들아.


그러니까 늬들이 절친이든지 연인이든지,

깨를 볶든지 사랑싸움을 하든지,

나한테는 놀랄 일도 아니다 이 말이야.

아무튼 늬들 사랑하기 좋은 시절에 태어났다 이 말이야.


이 말들을 하진 않았다. 굳이 내 얘기를 밝힐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리고 솔직히 너무 라떼얘기라.


대신 이렇게 말했다.


"축하해."


우정이와 메린이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슬며시 웃었다. 긴장이 풀린 얼굴이었다. 아, 이 선생님은 괜찮은 사람이구나. 그런 안도감 같은 게 보였다.


"근데 커플이라고 같이 상담하는 건 안 돼. 상담은 무조건 1:1로."


웃음이 멈췄다.


"메린이 나가."


상담하는 40분도 떨어져 있기 싫어서 수를 쓰는 병아리 커플.

귀여운 것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 이것들아.

그때 내가 싱글이라 질투한 건 아니었다.

진짜다.



매거진의 이전글D-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