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ep 20. 도망가자

by 오엉


벌써 12월.


많은 일이 있었다. 두 번째 해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때 난 이미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담을 받기 시작하면서, 내가 12살짜리 일진 여자애들한테 끼지 못하고 괴롭힘이나 당하고 있는 28세 여성이었다는 걸 인지하면서, 자꾸만 '상담교사 나부랭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연스럽게 그만둘 생각을 했다.


배운 대로 경청하고 공감하고 상담하지 못하고, 초심자의 열정으로 진심으로만 상담하니 내 마음 다치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기 싫어지고, 아이들의 행복에 관심이 적어졌다.


원하지 않는 길이었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고, 대학원 갈 돈은 내가 벌어서 가자 싶어서 온 거였으니까. 다시 떠나자. 그런 마음이 섰다.


유학 준비가 끝날 때까지만 이 학교에 있자. 입학 서류 준비되면 여기서 의원면직 하자. 그런 생각이었다.



근데 삶은 늘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더라.








이 학교를 떠야겠다, 그 결심을 하게 만든 건 윤아였다.



메린이도 소진이도 아닌 윤아. 소진이랑 제일 친했던 애. 학교 탈출도 같이 했던 그 애. 전학 오자마자 소진이와 절친이 되면서 그 무리에 자연스럽게 꼈다. 조그맣고 예쁘장하고, 서클렌즈 낀 눈이 까만 단추 같았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쿠션인지 파데인지 미백선크림인지를 꼭 바르고 다녔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는데, 말을 할 때면 또박또박 또랑또랑하게 했다. 소진이 옆에 늘 붙어 다녔다.


그날 방과 후에 상담실이 시끌벅적했다. 메린이 소진이 무리가 아닌 다른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천진난만하고 유치하고 순한 아이들. 방과 후에 갈 곳 없는 애들이 상담실에서 보드게임 하고 그림 그리고 놀곤 했다. 보고 있으면 절로 편안한 미소가 지어지는 아이들. 그 애들이 노는 소리가 복도까지 나갔나 보다.


소진이랑 윤아가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소진이는 퇴원한 후여서 소진이만 보면 안쓰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괜찮아?' 하는 걱정 어린 물음. '네. 괜찮아요.' 하는 처연한 미소.


하지만 이 아이들이 상담실에서 약물자해를 한 뒤 '방과 후 상담실 접근금지' 상태인지라, 마음 굳게 먹고 말했다.


"오늘은 안 돼. 나가세요."


"왜요?"


"오늘은 이 아이들이 방과 후에 놀기로 예약해 뒀어. 그리고 너희는 방과 후에 올 수 없잖아."


그 말을 하는데 내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힘을 줬다. 경계. 넌 학생이고, 난 선생이야. 더 이상 너희 맘대로 안 된다.


"아, 썅."


조그맣고 예쁘장한 윤아 입에서 욕이 흘러나왔다.


날 보면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상황에 대한 욕이었을 거다. 근데 갑자기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너 뭐라고 했어?"


윤아가 날 쳐다봤다.


"내 앞으로 와서 다시 말해 봐."


윤아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로 날 똑바로 바라보며 웃으며 얘기했다.



"싼이요, 싼. 이 얼 싼 할 때 싼. 오늘 중국어 배웠거든요. 삼이라는 뜻이에요."



웃고 있었다. 분명히 웃고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근데 그 서클렌즈 낀 까만 단추 같은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눈이 날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이번엔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


소진이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윤아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윤아야." 그 애들이 나갔다. 문이 닫혔다.


상담실에서 놀던 애들도 괜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조용해졌다. 내 눈에선 불이 나고 있었을 거다. 손이 떨렸다.


최윤아. 이 썅년이.







그날의 감정은 분노였다. 12살짜리한테 저런 식으로 무시를 당하다니. 선생님 면전에서 욕을 하고, 그걸 중국어라고 둘러대고, 웃으면서 빠져나가다니. 분노가 치밀었다.


근데 다음 날부터 분노가 아니라 공포와 불안으로 바뀌더라.


그 쥐콩만한 계집애의 서클렌즈 낀 까만 단추 같은 눈이 자꾸 떠올랐다. 날 바라보면서 "썅" 하는 모습이 계속 보였다. 그 까만 단추 같은 눈. 웃지 않는 눈. 그 눈이 날 계속 괴롭혔다.


졸업하면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졸업식까지만 버티자, 졸업식까지만 버티자. 그렇게 버텨왔는데.


근데 졸업하면 끝이 아니잖아.


그 까만 단추 같은 눈을 달고, 중학교 교복을 입고, 중학교 교복을 입은 다른 애들을 끌고, "선생님 보러 왔어요!" 하며 찾아오겠지. 그 까만 단추 같은 눈이 어떤 감정인지도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간식 주세요." 하며 나한테 먹을 것만 얻어서 나가겠지.


메린이는 교복도 바지를 맞춰 입겠지. 짧은 머리에 축구공 들고 나타나겠지. 소진이는 교복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짧고 타이트하게 줄여 입겠지. 마이든 가디건이든 한쪽 어깨 드러나게 흘려 입고 처연한 얼굴로 나타나겠지. 윤아는 그 옆에 붙어서 까만 단추 같은 눈으로 날 쳐다보겠지.


그런 생각들을 하니까, 내가 얘네들에게서, 이 악몽 같은 애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무서운 생각이 드는 거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바로 옆 중학교로 진학할 텐데. 걸어서 5분 거리인데.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거리인데.

이 학교에 있는 한, 난 평생 저 애들한테서 벗어날 수 없겠구나.


그래서 다른 학교로 가기로 했다.


도망가자.


도망 맞다. 그때 나는 그 애들로부터 도망쳐야 했다. 나를 지키기 위해. 그 까만 단추 같은 눈과, 그 쥐콩만한 몸과, 그 나를 간식 셔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대하는 태도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유학은 나중 일이 됐다. 당장은 여기서 벗어나는 게 먼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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