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빅. 암호를 대시오.

Part 2. ep 4. 로봇, 윤지호

by 오엉


상담다운 상담은 아이들이 학교에 등교하고 비로소 시작됐어. 여름쯤이었나, 1학년 지호는 등교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상담실에 왔는데, 담임선생님은 그 애가 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고', '이상하고', '친구가 없고', '공격적'이라고 하셨어. 어머님 동의는 본인이 받아놨으니 상담 좀 해달라고.


지호는 다른 1학년들에 비해 키가 무지 크더라. 깔끔하게 깎은 짧은 머리는 젤을 발라 멋을 부렸고, 옷도 깨끗하고 예쁘게 입었어. 시원시원하게 생긴 얼굴이 '이야. 뉘 집 아들인지 깔쌈하네!'라는 생각이 드는 아이였어. 방과 후에 책상을 메고 상담실에 들어온 아이에게 "어 네가 지호니?" 하자 대답 없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어. "지호 맞지?" 하니까 내 눈을 바라보며 자기 눈을 꿈뻑. 꿈뻑. 어벙하고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하는 꿈뻑꿈뻑이 아니라, 뭔가 꿈뻑꿈뻑 자체에 메시지가 있는 것 같은 다분히 의도적인 꿈뻑꿈뻑이었어. '뭐지?'


"1학년 3반 윤지호 맞으면 손 들어보세요~~~~~!"


저학년 애기들한테는 하이텐션으로 다가가야 하거든. 말없이 눈 깜빡임으로 대답하는 아이에겐 응당 몸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질문을 바꿔줘야지. 역시나 지호가 반응을 보였어.


"위잉- 치카. 위잉- 치카."


지호의 손이 두 번에 나눠 올라갔어. '아 이거구나.' 싶더라고.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신 '다르고', '이상한' 부분. 이런 거구나.


"와아??? 역시 지호가 맞았구나!! 그런데 지호는 로봇같이 움직이네!!"


억텐으로 응수하자 지호가 또 반응했어.


"삐빅. 나는 로봇입니다. 작동시키려면 암호를 푸시오."




KakaoTalk_20260223_162954939.png 출처: 영화 에이아이(A.I.)





아니 암호가 도대체 뭘까? 아니 애초에 자기가 로봇이긴 무슨 로봇이야. 나도 이런 애는 처음 봐서 어이도 없었고, 숫자인지 영어인지 한글 단어인지도 모르겠는 그 암호라는 것도, 내가 독심술을 사용해서 단번에 쟤 머릿속을 헤집어보고 암호를 맞춘다고 해도, '땡- 틀렸습니다.' 하면 끝이잖아. 그런 이상한 자기만 아는 규칙과 자기만 아는 정답과 자기만 이기는 싸움 그런 거, 나도 조카랑 많이 해봐서 알아. 그거 되게 사람 기빨리게 하거든. 내가 딱 싫어하거든. 근데 이상하게도, 지호와의 첫 만남에선 기꺼이 그 놀음에 놀아나주고 싶더라. 진짜 이 암호를 풀어야만, 우리의 상담이 시작될 것 같았달까.


"3681"


나는 4자리 숫자를 하나 말했어. 진짜 나도 바보 같지. 4자리 숫자면 경우의 수가 10*10*10*10 인데, 내가 왜 미쳐가지고 4자리 숫자를 처음 말했을까. 뻔뻔하게 한자리 숫자로 할걸. 하지만 내가 숫자를 말하자마자, 로봇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꼬리가 찢어질 듯이 올라갔어.


"땡! 다시 입력하시오."


내가 장단 맞춰주니까 좋아서 죽겠는 와중에 땡 이래. 틀렸대. 다시 입력하래. 나는 또 억텐으로 "아이 틀렸네! 역시 처음부터 맞출 수 있을 리가 없지!! 3682!!" 하는 식으로 장단을 맞춰줬어. 처음에는 진짜 한자리 숫자씩만 바꿔서 '진짜 정답'이 뭔지 한 번 찾아보려고 했는데, 얘 반응을 보니까 처음부터 암호는 정해진 게 없는 것 같더라고. 내가 4자리 숫자를 하나 말하고 틀릴 때마다 크게 상심하면, 수십 번의 시도 끝에 그냥 자기 마음이 흡족할 때 "딩동댕! 맞았습니다! 축하합니다!"가 나왔거든. 내가 방방 뛰면서 기뻐하면 곧장 두 번째 암호를 또 풀어야 한다고 하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끝까지 암호를 풀어냈고, 지호는 "와! 암호 끝까지 푼 사람 처음이에요!" 하며 로봇 속에 숨어있는 진짜 윤지호를 보여줬어. 그날부터 지호는 늘 로봇으로 왔다가, 윤지호로 나갔어.



상담실에 오기 전까지는 교실에서 내내 로봇으로 있었다는 게 참 가슴 아픈 일이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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