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그란 까만 선의 바다

Part 2. ep 6. 로봇, 윤지호 3

by 오엉


지호는 그 후로도 자동차 얘기, 로봇 얘기를 하곤 했어. 하지만 좀 변화가 생겼지. 내가 지호에게 종이와 연필을 쥐어줬거든. 종이에 여러 개의 선을 겹쳐 바둑판을 만들어내더니, 바둑판 선을 따라 움직이는 자동차와 로봇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거야. 그건 단순한 바둑판이 아니라 그 아이만의 세계였어. 선과 자동차와 로봇만이 존재하는. 우린 바둑알을 자동차, 로봇 삼아 룰도 없는 이상한 바둑게임을 열심히 했어. 나는 늘 아반떼, 지호는 늘 GV70이었어.


지호는 이제 내 앞에서 자주 로봇이 아닌 윤지호의 모습이었는데, 윤지호는 잘 웃는 아이였어. 바둑게임에서 내내 이기다가도, 내가 너무 상심하면 기꺼이 룰을 바꿔 나를 이기게도 해주는 아이였어. 억울한 것도 화나는 것도 슬픈 것도 많은 아이였지만, 속내는 퍽 다정하기도 한 아이였지. 그런데 그런 감정에 대한 인식을 깨우려고 할 때마다 늘 로봇으로 돌아갔어. 어제는 친구가 다쳐서 걱정되고 슬펐다는 내 말에도 "왜. 다쳤나요.", "왜. 슬픈가요." 하며 말끝을 내렸어. 엄마, 아빠, 할머니, 외할머니 중 누군가 아프면 어떨 것 같냐는 말에도 "잘. 모르겠는데요."하고 말았지.


바둑판이 수십 장 생겼을 즈음, 지호는 미로로 넘어갔어. 선이 사실은 길이란 걸 스스로 알아차린 걸까? 나는 그게 그렇게 기특하더라. 미로를 탈출하는 게임에서도 여전히 자동차만 쌩쌩 달리고 있었는데, 주변 환경이 생기기 시작했어. 미로 바깥 구석구석에 그려 넣은 크고 작은 울퉁불퉁한 동그라미. '바다'라고 했어. 바다를 알아볼 수 있게 색을 좀 칠해달라고 하면 늘 단호하게 거절했어. 지호의 그림엔 늘 까만 연필 선뿐이었거든. 파란 바다는 아니었지만, 까만 선뿐인 바다라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애의 마음속에 드디어 길과 바다가 생긴 거야.

생성형 AI로 제작한 이미지입니다.



겨울방학을 앞두고는 새로운 놀이에 빠졌어. <포스트잇에 글을 써서 빠르게 휙휙 흔들면 상대가 글 내용을 알아맞히는 놀이>야. 지호는 대체로 '팰리세이드보다 GV70이 좋다', 'GV70은 중형 SUV다'같은 걸 써서 내가 도통 못 알아맞혔고, 나는 대체로 '지호가 상담실에 와서 좋다', '지호가 친절하게 말해줄 때 고맙다'같은 걸 써서 지호가 도통 못 알아맞혔지. 하지만 상대방이 여러 번 시도하다가 너무 어려워하면,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든지 후하게 포스트잇을 천천히 흔들며 정답을 맞히게 해주곤 했어.


어느 날엔 내가 포스트잇에 '지호야, 나는 지호와 함께 하는 시간을 정말 좋아해. 앞으로도 서로 마음 얘기 나누며 사이좋게 지내자.'며 아예 편지를 썼는데, 지호는 역시나 알아맞히지 못했고, 나는 지호가 정답을 맞힐 수 있게 포스트잇 흔들기를 아예 멈춰줬어. 지호가 신나서 포스트잇 내용을 읽었고, 나는 "정답~!"을 외치고는 지호에게 포스트잇을 건네줬어. "너에게 주는 편지야."


그랬더니 지호가 어떻게 했게?

내 눈앞에서 포스트잇을 쫙쫙 찢어서 날려버렸어. 와하하- 웃으면서.


이전에도 내가 준 편지를 찢어버린 적 있었거든. 그땐 정말 너무 깜짝 놀랐는데, 도대체 어떤 마음이 들어서 편지를 찢은 건지 물어보니까 감정주사위에서 '부끄러움'을 찾아서 보여주더라고. 자기를 소중하게 대해주고 좋아해 주고 사랑해 주는 간질간질한 마음을 아직 못 견뎌하는 거야. 많이 겪어본 적이 없어서.


이번에는 놀란 마음을 애써 침착하게 가라앉히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했어. "내가 너에게 주는 편지라고 했잖아!", "내가 정성껏 쓴 편지를 찢어버리다니 너 정말 너무해!", "나는 지호와 함께 하는 시간이 좋다고 했는데 네가 편지를 찢어버려서 정말 너무 속상하고 슬프다!"


내가 속상해할 때마다 지호는 나름의 논리를 펼쳤어. "왜 슬퍼요.", "다시 쓰면 되잖아요.", "찢은 걸 붙이면 되잖아요."


지호의 노력에도 나는 굽히지 않았어. 계속 슬퍼하고, 지호의 행동이 나에게 어떻게 상처를 줬는지 설명하고, 크게 속상해했어. 그랬더니 지호가 혼자 한참을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어.


"그럼 내가 미안하다고 써줄까요..?


조심스럽고 고민스러운 물음이었어. 다친 내 마음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듯이, '내 사과로 당신의 마음을 낫게 할 수 있을까요..?' 하는 듯이, '마음'이라는 걸, 자기도 이제 뭔지 안다는 듯이, 그렇게 물었어. 마음속에 몰려오는 감동을 애써 숨긴 채로, 그랬으면 좋겠다고 대답했고, 지호는 포스트잇에 '죄송해요'라고 써서 나에게 줬어. 그 순간이, 정말 그해 최고의 명장면이었어 나에게는.


아직은 마음속에 미로와 자동차와 동그란 까만 선의 바다뿐이지만, 그것들만을 가지고도 자기의 것이 아닌 다른 마음을 읽어보려는 노력을 할 줄 알게 된 게, 너무 신기하고 기특해서. 예쁘고 애틋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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