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ep 8. 로봇, 윤지호 5
어느새 6개월이 지났어. 어머님은 정말로 휴직을 하셨고, 병원에 다니기 시작하셨어. 지호에 대한 약물치료를 시작하기 전에, 어머님이 먼저 약을 체험해 본다고 하셨어. 아무래도 어린 아들이 걱정되셨던 것 같아. 대신 하루 종일 매일매일의 지호 케어를 스스로 책임지시면서, 아이에게 양질의 정서적 안정감을 주시게 됐어. 단타를 끊으시게 된 건 덤이고.
아이는 더 이상 친할머니, 외할머니로부터 듣던 "이야, 키 크다.", "이야, 다른 애들보다 몸집 크다." 하는 것만이 칭찬과 애정이 아니라, 엄마로부터 듣는 "지호야 사랑해", "지호야 엄마한텐 지호가 너무너무 소중해" 하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됐어. 그러다 보니 유독 약하고 작은 아이들만 골라 괴롭히던 일도 줄어들었고, 희한하게도 약물 없이도 STOP이 조금씩 가능해지기 시작했어. 놀라운 일이었지.
지호는 요즘 엄마 아빠 이야기를 많이 했어. 예전엔 가족에 대해 물어보면 "검색되지 않습니다.", "알 수 없음.“ 하던 애가, 이젠 주말에 뭐 했냐고 물으면 "아빠랑 레고 했어요.", "엄마랑 마트 갔어요." 이런 말이 술술 나왔어. 엄마/아빠에 대한 초기기억을 물으면 "없어요. 몰라요. 잊어버렸어요."로 일관하던 애가, 이젠 "엄마랑 아빠랑 나랑 셋이서 놀이공원 갔었어요."라고 말해줬어. 난 정말 이 모든 게 어머님 덕분이라고 생각해.
어느 날, 지호가 상담실에 들어왔어.
"지호야, 오늘은 로봇 할래, 윤지호 할래?"
내가 물었어. 예전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지. 지호가 당연히 로봇으로 오면 당연히 암호를 풀어야 했고, 윤지호로 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으니까. 근데 어느 날부턴가, 지호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것 같은 거야.
지호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어.
"오늘은 그냥 지호로 할게요."
그 말이, 참 듣기 좋았어.
그날 우리는 텀블링 몽키를 했어. 야자수 모양의 플라스틱 기둥에 원숭이들을 매달아 놓고, 색색깔의 막대를 하나씩 빼면서도 원숭이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 그 게임. 지호는 이 게임을 좋아했어. 원래는 막대를 얼기설기 다 꽂아놓고 원숭이를 야자수에 부어 게임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날은 지호가 본인이 만든 작품이 마음에 들었는지 갑자기 다른 말을 했어.
"이건 타워예요. 이 타워의 이름을 뭐로 할까요? 어어 이건 위클래스타워예요!"
텀블링 몽키의 야자수를 위클래스타워로 명명하고 나자 순식간에 도로가 만들어지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어. 열쇠 체크 하는 직원도, 엘리베이터 수용인원을 관리하는 직원도 나타났지.
"여긴 도시예요! 위클래스타워가 있어서 사람들이 몰려들어요. 웨이팅이 3시간도 넘어요. 인기가 무지 많아요!"
나는 이 아이와 처음 만난 1년 전 여름을 떠올렸어. "삐빅. 나는 로봇입니다. 작동시키려면 암호를 푸시오." 내가 4자리 숫자를 하나 말하고 틀릴 때마다 크게 상심하면, 수십 번의 시도 끝에 선심 쓰듯 맞았다고 해주던 그 여름. 곧장 두 번째 암호를 또 풀어야 한다고 하긴 했지만.
지난가을엔 종이에 바둑판을 그려놓고 룰도 없는 이상한 바둑게임을 열심히 했고, 겨울부턴 미로를 수십 장 그렸어. 미로엔 종종 바다가 등장했는데, 내가 바다를 알아볼 수 있게 색을 칠해달라고 부탁하면 늘 단호하게 거절했지. 자동차만 달릴 수 있던 미로에 봄부터 못된 외계인이 등장했고, 몇 주 후 친구들이 등장하고 바다가 색칠된 어느 날 나는 하트를 봤어.
종결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내 마음을 살폈어. 기쁘지 않고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걸 보니 아직은 갈 길이 멀었구나 싶더라. 그래도 "요즘은 친구 사귀는 재미에 푹 빠져 있어요."라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는 지호를 떠올리면 웃음이 났어. 한 달 뒤 종결날엔 성대한 파티를 열어줘야지.
그즈음 읽고 있던 <놀이치료로 행복을 되찾은 아이, 베티>라는 책의 베티와, 지호가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우데부인이 되려면 몇 십 년은 더 걸려야겠지만, 그래도 지호는 베티처럼 하트도 만들고 친구와 멋진 오후도 보내고 만족스런 미소로 갖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로봇이 아닌 윤지호로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친구 이야기나 가족 이야기를 신나게 하고, STOP이 조금씩 가능해졌어도, 그래도 지호와 지호네 가족은 아직도 길고 좁은 산마루 앞에 서 있다고 생각도 들었지. 어머님의 휴직은 영원하지 않을 거고, 부부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것도 아니고, 지호의 상처나 문제행동이 말끔히 다 없어진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괜찮아.
내 마음속 불안에게 '쉬-', 잠깐 자리를 비켜달라고 했어.
지금은, 위클래스타워가 세워진 도시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웨이팅이 3시간이 넘는 이 순간을, 함께 기뻐해주면 되는 거야.
나의 베티는, 오늘도 조금씩, 잘 자라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