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 받으세요

Part 2. ep 9. 부장님

by 오엉

큰 학교엔 학생들만큼 교사들도 많아. 학생은 1,000명이 넘었고, 교직원은 80명이 넘었어. 한 학년 당 열 반에서 열한 반 정도에 전담교사나 비교과교사 두어 명을 붙이면 동학년이 금방 열셋, 열네 명이 되었지. 그래서 다들 자기 학년 선생님들을 제외하고는 잘 몰랐어. 코로나 시기라 환영회나 회식도 하지 못했고, 교직원 회의를 가도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고, 애초에 학교가 커서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누가 몇 학년의 누구인지조차 잘 몰랐어.


큰 학교는 그래서 각자도생이야. 서로 깊이 알려고 하지 않아. 자기 학년, 자기 업무만 잘하면 돼. 누가 뭘 하든 관심도 없고, 관심 가질 여유도 없어. 어떻게 보면 삭막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편하기도 해. 일할 사람이 많아서 학년부장이나 기능부장 안 맡으면 각자 학급운영 열심히 하고 주어진 조그만 업무만 열심히 하면 되거든. 승진 생각 이미 내려놓은, 쥐 죽은 듯 조용히 있고 싶은 사람들이 오는 곳. 나서지 않아도 되고, 티 나지 않아도 되고, 그냥 묻혀서 내 일만 하면 되는 곳.


그런데 그 부장님은 달랐어.


새로 오신 부장님이셨는데, 40대 초반의, 키가 크고 덩치가 아주 좋은, 미혼의 남성이셨어. 이 학교에 온 첫날부터 위클래스를 찾으셨지. "여기가 상담실, 위클래스 맞죠?" 호방하고 시원시원한 큰 목소리. "제가 늘 상담선생님들하고 친하게 지내서요."


죽이 잘 맞는 상담선생님이 있으셨었나보다, 생각했어. 나도 지난 학교에서는 발령 동기인 담임선생님들과 정말 친하게 지냈었거든. 사회 초년생들끼리 모여 퇴근 후 매일같이 술을 퍼마시며 학교생활의 설움과 슬픔을 이겨냈어. 그 힘든 학교에서 2년을 버틸 수 있었던 건 정말 걔네들 덕이 컸어. 진짜 재밌었거든.


"그러셨군요. 앞으로 자주 뵈어요."


나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친절을 보였어. 그가 오면 웃는 얼굴로 맞이하고, 커피나 시원한 음료를 내주고, 그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들어줬지. 근데 어느 날 그가 내게 줄 게 있다며 상자 하나를 내밀었어. 새 학기가 시작한 지, 그러니까 내가 그와 서로 안면을 튼 지 2주일도 안 된 시점이었어.



이해를 돕기 위한 사진입니다.



백화점 브랜드 기초 화장품 세트였어.


내가 의아해서 이게 뭐냐고 물었어. "화장품이잖아요." 하시더라고. 아니 내가 이게 화장품인지 몰라서 묻는 게 아니고. 사탕이 뭔지 뻔히 알면서 사탕을 먹고 싶어서 "이거 뭐예요?" 하는 어린애도 아니고. 그한테 화장품을 받을 이유가 없는데 나한테 '줄 게 있다'며 화장품을 내미니까 묻는 거잖아. "아뇨, 화장품인 건 알죠. 이걸 절 왜 주시는 건데요?" 하니까 부장님이 그랬어.


"뇌물 받으세요."









그때부터 내가 살짝 흥분했던 것 같아. 내가 부장님보다 높은 직위도 아니고 관리자도 아니고, 어떤 방면으로든 내가 부장님을 평가하는 사람도 아닌데 뇌물은 무슨 뇌물이며, 내가 모르는 그 어떤 방면에서든 부장님이 나한테 원하는 게 있어서 진짜 뇌물을 주고 싶은 거면 그건 더욱 받을 수 없으며, 그냥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나한테 호감을 사려는 거라면 이건 나를 너무 부담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더더욱 적절치 못하다, 하면서 온몸으로 저항했어.


근데 부장님은 당황도 하지 않고 웃으시더라고. 자기가 산 게 아니고, 여자친구가 잘 쓰는 제품인데, 이번에 싸게 할인을 해서 너무 많이 샀다며, 유통기한 안에 다 못 쓸 것 같으니 학교에 잘 보이고 싶은 선생님 있으면 하나 선물하라고 줬다는 거야.


그 이야기를 들으니 여러모로 많은 의심과 불안이 해소되면서 마음이 탁 놓였어. 그 변화를 캐치했는지 부장님도 때를 놓치지 않고 능글맞게 내 손에 그 박스를 쥐어주셨어. 친해지고 싶고, 앞으로 여러 일로 선생님 귀찮게 할 일이 많을 것 같대. 그래서 뇌물을 주고 싶대. 멋진 사람은 상대방의 호의는 호의로 그냥 받아들일 줄도 아는 거래. 더 이상은 거절하는 게 더 내 꼴이 우스울 것 같더라고.


"감사합니다, 부장님. 잘 쓸게요."


나는 결국 멋쩍게 웃으며 화장품을 받았어. 뭐, 여자친구분이 할인받아 사신 거라는데. 유통기한 안에 못 쓸 것 같다는데. 괜히 거절하면 분위기만 이상해지잖아. 엄마 쓰라고 줘야지 뭐, 했어.



그때는 몰랐어. 그 기초 화장품 세트가 얼마짜리 청구서로 돌아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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