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장이니까 나만 믿어

Part 2. ep 17. 육일공 4

by 오엉

제보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긴 했는데, 태어나서 뭐 제보를 해봤어야 말이지. 아. 해보긴 해봤어. 저녁에 길에 술 취한 행인이 쓰러져 자고 있거나 치매 노인이 횡설수설하고 있거나 하면 늘 112에 제보하긴 했거든. 그땐 출동한 경찰이 다시 나한테 전화 주면 받아서 자세한 위치 알려드리는 정도만 관여하면 됐었어. 하지만 이번 일은 사안의 경중이 좀 다르달까. 내가 노출되면 좀 곤란해.


근데 교육청 공익제보도 그렇고 국민신문고도 그렇고, 너무 내가 노출되는 거야. 익명제보가 좀 활성화돼야 되는 거 아니야?? 너무 답답했어. 내가 노출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녀를 어떻게 정신 차리게 할까 고민해 봤어. 방송국에 제보를 할까, 컴퓨터로 익명의 편지를 써서 교장실에 갖다 둘까, 그녀에게 발신번호표시 제한 문자를 보낼까, 별 생각을 다 했지. 근데 다 용기가 생기질 않더라. 너무 전면적인 방식은 이 좁은 사회에서 나에게도 분명 언젠가 좋지 않은 영향으로 돌아올 것 같았어. 그래서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소극적이고 비겁하게 접근하기로 했지.


"부장님, 커피머신 어디 있는지 들으셨어요?"


나는 교무실에서 만난 4학년 부장님한테 슬쩍 물었어. 나보다 5살 정도 많은, 착하고 일 잘하고 책임감 투철한 주미언니. 주미언니가 육일공이 자기 인사를 '고개 끄덕'하며 받고 가더라며 열을 내던 걸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주미언니는 나와 같은 분노를 느낄 거라고 생각했어. "커피머신? 아니? 왜? 찾았대요?" 주미언니는 역시 모르고 있었고, 나는 커피머신으로 시작해서 삼다수와 급식까지 말했지. 주미언니는 내 말을 들으며 목이 시뻘게졌어. 연구실에서 가져오는 락앤락은 학급운영비로 샀다는 얘길 할 때는 귀를 막으며 "아아악" 소리까지 질렀어. 다음 쉬는 시간에 교무실에서 다시 만난 주미언니는 수업 시간 내내 육일공 생각에 집중을 하나도 못 했다면서, 아이들 활동지 푸는 시간에 품의를 다 찾아봤다면서, 조선호텔 떡갈비랑 수제약과랑 동전파스 뭐냐고, 미친 거 아니냐고 교장/교감선생님은 진짜 모르시는 거냐고 길길이 날뛰었어.


그동안 학부모회 담당 선생님이나 사서쌤과 이야기할 때는 못 느꼈던 카타르시스를 느꼈어. 그래 이거지. 이게 찐 반응이지. 교장선생님, 교감선생님 얘기를 먼저 꺼내시다니 반가운 마음뿐이었어. "그러니까요. 진짜 모르시는 건지 모르는 척하시는 건지. 아 근데 교감선생님은.. 그 선생님이랑 불편해서 안 건드시는 걸 수도 있겠다."


나도 모르게 그 일이 생각났어. 작년 말에 젊은 선생님들 입을 타고 전해 들은 소문이야. 작년 3월 육일공쌤이 이 학교로 전입해 오고 첫 보결을 들어가야 했을 때, 그때까지 이 학교는 담임교사에게는 보결수당을 주지 않았던 모양이야. 그래서 육일공쌤이 교무실에 가서 교감선생님께 담임이 담임학급에 보결을 들어가도 보결수당을 달라며 옥신각신 하다가, 교감선생님께 "웃어?" "지금 웃음이 나와?!!!" 하며 소리를 질렀다는 그런 이야기. 그 후로 교감선생님이 육일공은 전혀 건드리지도 않고, 우리학교에는 담임교사의 담임학급 보결 수당이 생겼다는 그런 이야기. 육일공이 젊은 선생님들과의 술자리에서 "교감이 나 무서워하잖아." 하며 의기양양했다는 그런 이야기.


주미언니는 내 얘기를 듣고는 거의 눈물을 흘렸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으며 어떻게 교감선생님께 그렇게 싸가지 없게 할 수 있냐며. 어떻게 후배교사가 어떻게 선배교사한테 어떻게 그렇게 무례하게 굴 수 있냐며 티슈로 눈물을 찍어냈어. 그리고 교무부장님께 본인이 말씀드려 보겠다며, 그래서 교무부장님과 함께 교감선생님께 말씀드려 보겠다고 하셨어.


"이오엉 걱정하지 마. 내가 부장이니까 내가 말해볼게. 나만 믿어."


비겁하지만 나는 주미언니한테 일을 맡겨버렸어.

눈이 헤까닥 돌 수 있는 동료를 고발하는 일은 역시.. 너무 무서운 일이더라고.








주미언니는 정말 교무부장님께 이 이야기를 모두 전달했어. 주미언니가 하나 덧붙인 얘기가 있다면 '도미노피자'. 나는 육일공의 학급운영비만 보느라 캐치하지 못했던 건데, 주미언니는 육일공의 담당 업무인 '학생자치회' 예산 품의까지 다 봤더라고. 한 달에 한 번씩 도미노피자를 시키더래.



도미노피자 수정.png 이해를 위해 생성형 AI로 제작한 이미지입니다.



학생자치회 학생들을 모아 회의를 하거나 자치회 활동을 하며 간식을 준 거라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인데, 문제는 육일공이 학생자치회 업무를 맡은 후로 우리 학교 학생자치회 활동이 0에 수렴했다는 거야. 주미언니는 의혹을 제기했고 교무부장님은 자치회 학생들을 불러 조사했지. 피자값은 지출됐는데 피자를 먹은 학생은 한 명도 없었어. 이 또한 놀랍고도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었지. 육일공이 육일공 했다. 그 정도.


며칠 뒤 주미언니와 교무부장님은 교감선생님께 말씀드렸대. 얼마나 민망하고 말씀하기 어려우셨을까 싶지만, 그래도 다른 선량한 후배교사들을 위해 주미언니와 교무부장님은 용기를 내셨어. 교감선생님은 알겠다고, 본인이 확인해 보시겠다고 하시며 누구누구가 알고 있는지 확인 좀 해보라고 하셨대. 아무리 그래도 같은 학교에서 일하는 동료인데 이미지가 너무 실추되면 안 되니까 알고 있는 사람들 입조심시키라고.


그 말씀이 너무 야속하게 느껴졌지만 그분의 인품이 그만큼 좋으신 걸 어떡하겠어. 우리는 아는 사람들끼리만 알고 더 이상 퍼트리지 말자고 약속했지. 교감선생님이 아셨으니까 해결해 주실 거야. 그분이 혼내주실 거야. 더 이상 그런 일 생기지 않을 거고, 애들 급식도 안 먹을 거고, 그동안 안 낸 급식비도 내겠지. 우리는 그렇게 믿었어.


그런데 며칠 뒤 주미언니가 전달한 교감선생님의 말씀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려웠어.


'할 수 있는 조치 없음.'


그게 교감선생님의 결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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