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제 연금이 중요해서요

Part 2. ep 19. 육일공 6

by 오엉

정미언니가 바로 교장실로 달려간다는 걸, 행정실장님께서 극구 말리셨나 봐. 계장님이 혹시나 교장선생님께 밉보일까 봐 조심하시면서, 그래도 행정실의 수장으로서 본인이 책임을 지시려고, 본인이 교장선생님께 말씀하시겠다고 하셨대.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교장실에 가서 직접적으로 육일공의 문제를 '고발'하신 건 아니고, 점심식사 같이 하시면서 넌지시 말씀하셨나 봐. 한 선생님께서 품의에 애매한 물건이나 식품을 올리실 때가 종종 있는데, 그걸 사드려도 되는 건지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가 있다, 그걸 다른 선생님들도 좀 알고 불만을 가지시는 것 같다, 교직원 회의 시간에 예산 사용에 대한 전체 연수를 한 번 하겠다, 하는 식으로.


들려온 소문에 의하면 교장선생님은 행정실장님의 말에 "아 그래요? 다른 학교에선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던데. 우리 학교는 없을 텐데?" 하고 묵묵히 식사를 하셨대. 그러고는 교감선생님을 불러 노발대발하셨다는 거야. 행정실장 지가 뭔데 선생님들 교육활동을 그런 식으로 의심하고 폄훼하냐고. 그 소문을 들은 정미언니 희경언니는 분기탱천했어. "맨날천날 말씀하시는 '교육가족'의 품 안에 우리 같은 행정실 사람들은 없는 거구나?" 하면서.


하지만 행정실장님의 전체 연수는 진행이 됐어. 행정실장님은 '다른 학교에서 겪었던 사례'라고 강조하며 아이들 간식으로 프로틴칩을 사던 교사, 에어프라이기를 사서 집으로 가져가던 교사, 급식비를 안 내고 급식을 먹던 교사들의 이야기를 하셨지. 누구 얘기인지 아는 나랑 주미언니는 실장님 얘기를 들으면서 손이 막 덜덜 떨리더라. '어떡해요. 너무 다 말씀하시는 거 아니에요?' 우리는 떨리는 손으로 필담을 나눴어. 육일공이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하면서 실장님한테 달려들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을 했어.


근데 육일공은 어땠게? 의자에 눕듯이 앉아서 핸드폰만 하고 있었어. 자기 얘기를 늘어놓는 실장님을 앞에 두고 말이야. 그녀의 얼굴에 불안이나 초조함 따윈 없어 보였어.


실장님의 연수가 끝나자 자리에서 일어나서 뒷문으로 나가더라. 실장님과 육일공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시작됐어. 실장님 말씀처럼 예산을 옳지 못하게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는데, 요즘도 그런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라고 하시더라. "아마 없지 않을까요?" 하며 방금까지 있었던 실장님의 연수 내용을 무의미하게 만드셨어. 혹시나 그런 교사가 있다고 해도, 교장으로서는 그 교사가 교육활동이라고 잘 둘러대면 어찌할 바가 없다며, 그걸 제지하면 '갑질 신고'를 당할 게 뻔하다고. "저는 제 연금이 중요해서요."라는 말까지 덧붙이며 자신의 입장을 밝혔어.


요즘은 학교 내에서 잘못 행실 하면 동료교사들에 의해 신고당하고 제보당한다면서, "괜한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동료교사들이 꼭 공익제보를 하더라고요."라고 하셨어. "우리 ㅇㅇ교육가족 여러분들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시길 바랄게요."라는 말이 피날레.




교장선생님의 학교 회의 중 발언.png 이해를 돕기 위해 제작한 생성형ai 이미지입니다.







육일공이 떠난 자리에서, 나를 포함해 육일공의 일을 알고 있는 다수의 선생님들은 교장선생님의 경고를 받은 거야.


난 일 크게 만들 생각 없으니까 너희도 괜한 정의감에 불타오르지 마. 입 닫고 사이좋게 지내.


이게 정말 최선인가?

이게 정말 한 학교의 '장'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처사인가?


한 학교의 장이자 선배교사이자 직장상사이자 '어른'으로서, 혹시라도 동료교사 중에 그런 사람을 발견한다면 본인에게 데려오라고, 그러면 그 사람이 더 이상 잘못된 길을 걷지 않도록 본인이 교장으로서 힘써 교육하고 설득하겠다고. 그것도 부담스러우면 차라리 우리한테 그런 동료교사를 발견하면 그러지 말라고 말려달라고, 그런 말씀을 하실 순 없었을까?


진짜 거기서 자기 연금 운운하며 근면성실한 평범한 교사들의 억울한 마음을 '괜한 정의감'이라고 폄훼했어야 했나?


억울하기 짝이 없었어. "왜 안 혼낸대 왜!" 하며 울분이 터져 나왔어.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이 현실이 너무 시궁창 같아서 그냥 다 꼴도 보기 싫었어. 교직원 회의가 끝나고 사서쌤은 교장선생님이 '뱀의 지혜와 비둘기의 순결'을 다 지켰다며 연신 냉소의 박수를 쳐대시더라. 아무것도 모르는 선생님들께는 실장님만 의심병 환자고, 교장선생님이야말로 '우리를 믿어주는 참 상사'였을 테니까. 그러면서 들썩거리는 '정의로운' 사람들도 잠재우고, 자기 연금도 안전하게 지키고. 얼마나 지혜로와. 학교 예산 그까짓 거, 자기 돈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겠어.


행정실에 교장선생님 말씀 내용을 전달하자 "교감선생님도 교장선생님도 결국 초등교사 감싸기구나." 하는 말씀을 하시더라. 행정실 너네 관여하지 마. 너넨 그냥 우리가 해달라는 대로 일처리나 해. 그런 말씀이네요. 하며 정미언니가 한숨을 쉬었어.


주미언니도 비슷한 입장이었어. 교장선생님께서 경고하신 거잖아. 여기서 어떻게 더 말을 꺼내겠어. 몰라. 난 평생 말 잘 듣고 살아온 인간이라 그런지, 그냥 이제 입 닫고 살래. 괜한 정의감 불태워봤자 뭐 해. 걔가 찍히는 게 아니라 내가 찍히게 생겼는데. 주미언니는 "우리 더 이상 이 얘기하지 말자. 잊고 살자." 했어.






울분 같은 강렬한 감정은 잠깐이었고, 기운 빠진 체념의 감정이 길게 이어졌어.




그래. 학교장이 저렇다는데, 뭐 하러 내가 모난 돌 되어 정을 맞겠냐.


근데 진짜.. 상종 못할 인간들이네.


초등학교 선생이란 것들.. 환멸 난다 진짜..


.. 진짜 그만둘까?




2년 만에 다시 한번 그 생각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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