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2. ep 22. 부장님 2
그 부장님 기억나지? 전입 오자마자 2주 만에 백화점 브랜드 기초 화장품 세트를 들고 찾아와서 "뇌물 받으세요" 했던 그 사람. 여자친구가 할인받아서 너무 많이 샀다길래, 아 그런가보다 하고 받았었잖아. 그때는 몰랐어. 그 기초 화장품 세트가 얼마짜리 청구서로 돌아올지.
그 부장님은 본인 전담시간마다 위클래스에 찾아오기 시작했어. 처음엔 뭐 업무 관련 이야기인가 싶었지. 근데 아니었어. 자기가 여자친구랑 동거를 한대. 여자친구랑 싸웠대. 여자친구는 얼마를 벌고 자기는 얼마를 번대.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들과 갈등들, 연애 고민들을 끝도 없이 늘어놓으셨어. 나는 그가 누구랑 사는지조차 궁금하지 않았는데 말야.
"어제 여친이랑 또 싸웠어요."
"제가 잘못한 건가요? 아닌 것 같은데."
"여자들은 왜 그래요? 선생님도 여자잖아요."
처음엔 그냥 들어줬어. 동료니까. 선배니까. 그리고 솔직히 화장품 받은 것도 있으니까.
근데 이게 한 번이 아니야. 하루에 두세 번씩, 전담시간이 있을 때마다 40분씩 꽉 채워 상담실에 있다 가셨어.
그러다 어느 날은 들어오시자마자 이러시더라.
"배설 좀 하고 가겠습니다."
배설. 배설이래. 본인 입으로 배설이라고 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 '딸깍' 소리가 났어.
아. 이 사람한테 나는 상담선생님이 아니라 감정쓰레기통이구나.
본인 안에 있는 더러운 것들 쏟아붓고 가는 하수구 같은 거구나.
그래도 참았어. 같은 학교 부장님인데 어떡해. 얼굴 붉히기 싫었어. 그냥 적당히 듣고 적당히 맞장구치고 적당히 보내드렸어. 근데 그게 1년이 됐어. 1년쯤 지나니까 그 사람 얼굴만 봐도 내 얼굴이 굳어지더라. 복도에서 마주치면 반사적으로 표정이 딱딱해졌어. 웃으려고 해도 안 웃어지는 거야.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거지. 더는 온화한 미소로 좋은 얼굴로 그를 대하지도 않았는데도 그는 계속 상담실에 왔어.
거기서 6개월이 더 지났어. 이젠 그 사람을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굳어졌어. 집에서 쉬다가도 '아 내일 전담시간에 또 오시겠지' 생각하면 명치가 답답해졌어. 그 부장님이 담당하는 학년 복도를 지나갈 때면 걸음이 빨라졌어. 혹시라도 마주치면 나와서 또 얘기할까봐.
그러다 어느새 겨울의 초입. 11월쯤이었나. 또 엉덩이가 가벼워져서 내신을 쓰냐 마냐 고민하던 그때. 그 인간이 일을 쳤어.
퇴근하고 집에 왔고, 저녁 먹고 씻고 이불 속에 들어갔지. '내일 또 출근하니까 유튜브 쫌만 보다가 일찍 자야지' 싶었어. 너무 행복한 순간이었는데, 카톡이 울렸어. 그 부장님이었어.
사진이 오기 시작했어. 1장, 2장, 3장...
그 사람 이름으로 카톡 알림이 온 것 자체로도 심장이 두근두근 요동치면서 열이 받는 거 알아?
근데 무슨 일인지 알 수 없게 '사진'이라고만 쓰인 미리보기 메세지가 거진 2-3분을 넘게 계속 오니까 말야. 열 받는 걸 넘어서는 열받음으로 심장이 터질 것 같았어. 네가 뭔데 내 퇴근 후 시간을 방해해. 네가 뭔데.
볼까 말까 고민하다가 열어 봤어. 분노도 호기심을 이기진 못하더라.
카톡창에 주르륵 나열된 건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었어. 꽃이랑 나무가 그려진 그림들. 1번부터 20번까지의 아이들이 그린 20개의 꽃나무들.
'저희 반 애들한테 오늘 꽃나무를 그리라고 했는데 이상한 애 없는지 좀 심리적으로 분석해주세요. 그림검사같은 거 하시잖아요.'
이불 속에서 그 메시지를 보는데, 온몸에 열이 확 올랐어.
미친 새끼.
2년 동안 감정쓰레기통으로 쓴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내가 뭐 버튼만 누르면 심리분석이 나오는 자판기야? 퇴근하고 집에서 쉬는 시간에 사진 20장 던져놓고 분석해달라고? 미친놈 아니야?
일단 답장 안 했어. 답장하면 욕이 나갈 것 같았어. 핸드폰을 멀리 던져놓고 눈을 감았는데, 잠이 안 오더라. 열이 안 가라앉아. 이미 얼굴부터 목까지 벌개진지 오래였어.
20분쯤 지났을까. 결국 답장을 썼어. 전문성이 보이면서도, 내가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걸 표현하고 싶었어. 분노를 꾹꾹 눌러담아 썼어.
'정식으로 진행된 그림 심리검사도 아니거니와, 그림 심리검사는 투사검사라 신뢰도가 높지 않아 다른 객관적 검사없이 그림검사만으로 아동 심리를 분석하지는 않습니다. 혹시 걱정되는 아이가 있다면 추후 학교에서 정식으로 의뢰해주시면 심리검사 진행해서 안내드리겠습니다.'
나름 선 긋는다고 쓴 거였어. 퇴근 후 시간에 이런 식으로 연락하지 말라는 뜻이었어.
보냈어.
읽었어.
씹더라?
읽고 씹더라? 답장이 없었어.
답장이 왔어도 뭐 아주 맘에 드는 답변은 아니었겠지만, 1이 없어진 대화창을 계속 바라보는 것도 짜증이 나더라. 답장을 안 해? 죄송하다고 안 해? 진짜 읽씹이라고? 하면서 계속 더 열받아 하더라고 내가.
아 진짜. 그날 밤 한 숨도 못 잤어. 천장 보면서 별 생각이 다 들더라. 내가 그때 그 기초화장품을 왜 받아가지고는. 뇌물이라고 뻔뻔스럽게 들고 올 때 어떤 인간인지 알아봤어야 했는데. 뇌물 먹였으니 지맘대로 해도 된다는 식의 사고를 하는 인간을 왜 상담실로 들여서 내가. 2년 전 봄의 나를 아무리 탓해도 시간을 돌이킬 수 없는 게 분하더라. 뇌물의 대가는 그렇게 2년에 걸쳐 청구됐어. 화장품 세트 하나에 2년치 감정노동과 불면의 밤들. 너무 비싼 거래였어.
생각은 계속됐어. 분명 이 부장님 개인의 문제인 건 알아. 나와 그 부장님이 잘 맞지 않는 성격이었을 수 있지. 근데 이 부장님에 육일공, 그리고 교장선생님까지 떠오르면서 '초등 선생님들하고 같이 일 못 해먹겠다.'까지 생각이 번졌어. 그러고나니 또 이 학교의 유별났던 학부모님들, 힘들었던 학생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어. 그리곤 첫 학교까지 논스톱. 메린이와 소진이, 소진이네 담임선생님, 재혼가정 그 아빠까지 내 머릿속으로 달려들어왔어.
요즘 시대에 학교에서 애들 가르치고 상담하는 거, 할 짓이 못되는 것 같다.
여기 떠야 된다. 이 직업 그만둬야 된다.
결국 결론은 그거였어.
근데 또 그만둘 생각을 하니까 10년 뒤 후회하지 않을까? 싶은 거야.
그래도 열심히 공부해서 전공 살리며 일 잘 하고 있는데, 사실 나름대로 '상담'이라는 일은 나한테 잘 맞는데 말이지. 그러다 든 생각이 교육청이었어. 열악한 학교에도 있어봤고 부유한 학교에도 있어봤으니, 진짜 교육청까지만 가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
교육청 위(Wee) 센터까지만 가보자. 거기는 애들도 없고 초등교사들도 없고 상담교사끼리 일하니까, 거기서 일 해보고, 거기도 아니면 그땐 진짜 그만두자. 교육계 이 썩은 거, 진짜 그만두고 취준하자.
그 새벽, 이불 속에서 결심했어.
한 달 뒤 정말 교육청으로 내신을 썼고, 다음 해에 교육청으로 발령 받았어.
교육청은 정말 괜찮을까?
내 마지막 여정을 시작할 때가 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