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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AULE Aug 26. 2020

오지 않았던 결혼날에 대한 기록

행복을 빌어주기엔 일러

결혼식을 올릴 뻔한 날은 비에 천둥번개까지 한참을 내렸다. 맥주 사러 나갔는데 차가운 바람이 엄청 불어서 엄마한테 드레스 입고 땀은 안 흘렸었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비오는 날 결혼하면 잘 산다고들 하지만 하객들에게 너무나 미안했을거란 생각을 했다. 그 와중에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주겠다고 우리집에 들르기로 한 친구는 친척의 부고를 받고 아침부터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내게 부케를 줬던 가장 절친한 친구이기에 그 우연한 이별 소식에 기가 막혔다. 하늘이 이 결혼을 말렸다.


결혼식을 올릴 뻔한 곳은 밥이 맛있기로 정평이 나 있는 예식장이었는데 코로나 행정조치로 인해 맛있는 식사 대접도 못했을 테다. 마음 편히 오지 못했을 소규모의 하객에게 드릴 답례품 마저 싸구려여서 식장과 기싸움 하며 속썩였겠지. 비가 내리는 바람에 제일 마음에 들었던 야외 정원에서의 촬영도 못 했을 거다. 마스크를 쓴 혼주와 하객에 원판 사진도 못 찍었을거고, 진심어린 축복을 받기 어려웠을 테다. 전 지구가 말렸다 정말.


곧 태풍도 찾아온다고 한다. 애저녁에 포기한 하와이 대신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준비했던 제주도 신혼여행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을 이번 주였지만 날씨는 내내 흐렸을거고, 태풍 때문에 전전긍긍했을테다. 아무리 신혼여행이었어도 코로나 시국에 놀러갔어야만 했냐고 눈총받고, 눈치보고, 신경쓰고 힘들었을거야. 온 우주가 말렸다.


하늘이, 세상이, 온 우주가 말렸던 결혼이었다고 생각하니 못 다한 결혼식에 대해 시큰둥해졌다. 솔직히 조금 심란해서 내 일을 제대로 못하긴 했지만 그렇게 울적하진 않았다. 다만 며칠 지난 오늘, 새벽에 눈이 떠졌는데 파혼을 통보받은 후 그에게 모질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원망도 못하게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그 말을 하던 그 순간의 내 감정이 울컥 치밀어서 아까운 눈물을 또 쏟고 말았다. 죽으면 못 만나니 납득이라도 하지, 좋아 죽겠는데 다신 보지 말자니 그냥 죽은 사람이 되어버리길 바랄 수밖에. 후에 정리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그를 만났을 때, 그 말이 참 속상했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죽으라는 말을 듣다니. 응, 너 속상하라고 일부러 그랬다고 했지만 진심이었다. 네가 차라리 죽은 사람이면 덜 힘들 것 같아. 엄마에게도 아빠와의 영원한 이별보다 더 슬픈 것 같다고 엉엉 울었다(엄마는 동조하는 대신 담담하게 다른 종류의 이별이라고 등을 토닥여줬다. 아빠 미안.).


결혼을 안 한 건 다행이다. 결혼을 뚝 떨어뜨려놓고 보니, 문제 하나 없이 결혼으로 골인했어도 내 인생 살기 힘들었을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새롭게 시작한 삶에 대해서는 후회가 없다. 다만 행복을 빌어주고 싶어도, 아직은 안 된다. 파혼을 만든 원인에 대한 원망은 아직 없애지 못했다. 나는 그가 자신의 선택을 아주 오랫동안 후회하길, 지금이 아니라면 언젠가 아주 지독하게 후회하길, 내가 없어도 달라지지 않는 하찮고 무기력한 날이 계속되길 바란다. 그래서 내가 없어서 찾았다고 생각한 행복이 진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절망적인 순간이 오기를. 그 때가 오면 진심으로 행복하길 빌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와 결혼하기로 했을 때는 마음아픈 이별을 경험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고마웠는데, 상황이 바뀌니 이제 이별을 겪게 해줌에 감사하다. 이 감사함은 콧방귀의 감사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을 올릴뻔한 날, 저 많은 가정법(결혼했으면 큰일날 뻔 했다)들로 함께 호들갑 떨면 딱인 사람은 이 결혼을 같이 준비했던 너였는데 말야.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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