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의 시작도, 끝도 똑같은 너에게
이제 앨범에 적어도 올해 네 사진은 하나도 없다. 처음엔 어려웠는데 종종 보이면 이젠 그냥 지우게 되더라고. 익숙해져가는 거겠지? 물론 이렇게나 행복했었는데, 아픈 마음 반, 왜 이렇게 못나보이냐 꼴보기 싫은 마음 반이긴 하다. 지나간 사람 잊고 열심히 잘 살고 성공하고, 행복해지는 게 최고의 복수라고 하던데 오늘도 나는 네 생각을 했다. 부모님 설득하는 일에 대해 얘기할 줄 알고 만나러 갔는데 너는 여기서 그만하자는 편지를 써왔던 마지막 날 저녁이 떠오르더라.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이야기냐고, 내가 그렇게 빛나고 소중한 사람인데 나를 왜 놓냐고 편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던 나였어. 좀 더 얘기해보자고 집 근처를 걸으며 갑자기 이렇게 결혼에 대해 걱정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각자 부모님의 결혼 생활에 대해 얘기하고, 때론 울고, 소리지르고 또 다시 차분하게 대화하고. 길었던 대화 끝에 나를 놓치기 싫다고 대답했던 너는 부모님을 더 설득해보겠다고 했어. 편지는 못 읽은 걸로 치겠다고 두고 나왔던 나는 우리의 마지막 대화를 철썩같이 믿었는데 너는 네가 쓴 편지 그대로 꺾이고, 숨어버렸지.
돌아보면 우리가 오랜 친구 사이에서 연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도 똑같았더라. 여름에서 겨울이 되는 동안 네가 먼저 내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꼈음에도 군복무 중이라는 이유로 더 다가오려 하지 않았었잖아. 오히려 내가 너를 점점 좋아하게 되면서 전역까지 반 년, 그 정도는 기다릴 수 있을거라 생각했었지. 너에 대한 마음이 커졌고, 너도 내 마음 같다고 확신했지만 너는 명백한 싸인이 없었어. 어떻게 해야 하나 매일 네 꿈을 꾸던 내게 도착한 내가 장난스레 부대로 보냈던 편지에 대한 답장. 너는 나한테 끌리는데 그게 내가 이성적으로 좋은건지, 그냥 외로워서 좋은건지 모르겠다는 정말 어이없는 말들을 적어놨었지.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네 입장에서는 책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 소심한 편지를 읽고 네게 전화를 했었어. 기회를 잡고 싶었거든.
‘나랑 만나고 싶다는 거야, 뭐야?’
내 솔직한 질문에 너는 자기 사정이 이러니 만나자고 하기 미안하다고 했어. 난 너 좋다고, 지금부터 이렇게 시작해도 난 좋다고 하면서 우리는 비로소 수화기 너머로 연인이 되었지. 얼굴도 안 본 채, 네 마음이 뭐고, 뭘 원하냐는 내 질문과 네가 좋다는 고백 끝에 전화로 시작한 인연.
정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종종 우리의 시작을 회상하면서 용기있던 나를 칭찬하라고, 운은 네가 띄웠지만 내 덕분에 만나서 행복한 줄 알라고. 결혼도 아파트 운운하며 운은 네가 띄웠지만 골인은 내가 시키는 것 보라며, 우리는 이런 식으로 쿵짝이 맞는 커플이라고 의기양양했었는데, 끝도 그렇게 날 줄이야.
그래 , 너는 편지로 용기없게 갖가지 상황을 들어 멀리 돌려 말했고,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네게 네 마음을 물어봤어. 그 때 겁쟁이였던 스물 다섯의 너를 알아챘어야 했을까? 네 몸과 시간이 군대에 묶여 있어도, 나를 놓치기 싫다는 의지로 네가 먼저 고백하길 기다렸다면, 우리는 이 결혼을 했었을까?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해보지만 더 상상할 것 없이 답은 안 봐도 뻔해. 내가 그 때 네 편지를 모른척 넘어갔다면 넌 내게 평생 그 마음을 고백하지 못했을 거야. 우리, 그리고 지금의 너와 나는 없었겠지. 8년 전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를 만나자고 했던 사람이라면, 한 달 전의 너 역시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가자고 했었을 거야.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스물 다섯의 너와 서른 둘의 너는 똑같은 사람이기에 우리는 이렇게 헤어진 거고.
행복했던 순간들까지 부정하고 싶지 않아. 그럴 필요도 없고. 다만 이렇게 수미상관마냥 똑같은 시작과 끝을 돌아보니 내가 정말이지 안 될 사람을 붙잡고 있었던 걸까, 그런 씁쓸한 생각이 들었어. 그래도 재밌지. 사람 진짜 안 변해. 이렇게 강렬한 이별을 겪었으니 8년 후의 너는 지금과 좀 달라지려나, 궁금하긴 한데 별 기대는 없어. 영원히 겁많은 아이로 남을 너를 더는 그리워하지 않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