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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AULE Sep 03. 2020

결혼을 준비한 덕에 헤어진거야

인연이 아니라는 말 이전에


결혼 준비를 한 덕분에 헤어질 수 있었네



오늘 내 청첩장 1호였던 옛 직장 멘토이자 인생의 좋은 언니인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결혼 준비를 한 덕분에 헤어질 수 있었던 거라고 해줬다. 그간 인연이 아니어서 헤어졌다는 말은 서글프기만 했는데 이 말의 효과는 놀라웠다.


그와 <라라랜드>를 보면서 나는 우리의 미래가 저럴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한 적 없었다. 당시에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에필로그의 ‘만약에’ 따위는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지금이야 우습지만, 나는 우리가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거란 자신이 있었다. 갖은 변화 속에서도 사랑은 굳건했고, 그가 내 손을 놓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막연히 이혼에 대한 걱정을 농담처럼 했어도 파혼은 정말이지 감히 상상해 본 적 없다. 그만큼 파격적이었던 우리의 끝은 영화의 마지막 플래시백 시퀀스를 처참한 심경으로 돌려보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난 시간 수많은 ‘만약에’를 그리며 괴로워 한 게 무색하도록 선배의 그 한 마디는 찐득하고 눅진한 여름에 붙어있는 내게 사막같은 건조함을 불어넣었다. 젖은 낙엽같았던 ‘만약 그 때 그랬다면 우리가 결혼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사라질 마른 낙엽이 되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바뀐 ‘만약에’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이전에 합의했던 대로 내 학위를 딴 이후로 결혼을 미뤘더라면 우리는 헤어지지 않고 계속 연애를 했을거야. 10년을 채우고서 결혼을 준비하다 우리는 결국 같은 이유로 이별했을거야. 내가 결코 채울 수 없을 너 자신도 모르는 네 욕망, 유난하고 무례한 아들 사랑, 원가족과 배우자 사이에서 아무것도 못할 네 우유부단함은 그대로일테고 그런 널 놓지 못하는 나도 그대로였겠지. 길어진 시간만큼 상처만 더 깊어졌을거야.


내가 그와 결혼에 골인하고, 자식을 키우는 모습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모습에 나 스스로도 머쓱해서 코웃음이 났다. 이 ‘만약에’는 이미 그려져 있는 밑바탕에 정해진 색만 쓱 칠하면 되는 정도의 쉬운 과정이었다. 그래, 우리는 그렇게 됐을거다. 그러니 조금만 더 일찍 헤어지지 않은 것에 원망하면서 괴로워하지 말고, 결혼 준비를 한 덕분에 좀 더 이르게 아주 잘 헤어지게 되었다 생각하자고. 이것 역시 결과론적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인연이 아니었다는 말보다 구체적으로 좋은 위로법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 결혼을 준비하다, 또는 결혼을 논의하다 끝난 사람들이 있다면 먼저 이렇게 말해 주면 좋겠다. 결혼 준비를 한 덕분에 헤어지게 된 거라고 말이다. 결혼했어도 힘들었을것이란 위로보다는, 결코 결혼으로 향하지 못했을 인연이라는 위로가 낫겠다. 아, 이제 나는 비로소 우리가 인연이 아니었다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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