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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Nov 22. 2019

#19. 뿌듯한 무력감

익스피리언스 데이는 돈을 벌기 위한 행사가 아니다

지난 2개월간의 대한민국은 시끄러웠다. 신임 법무부 장관을 끌어내리려는 세력과 그 세력에 맞서 장관을 지키려는 세력이 첨예하게 충돌했다. 광화문 광장과 서초동 대검찰청 앞 사거리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해 목소리를 드높였다. 마치 대한민국이 두 쪽이 난 것 같았다. 하루에도 수천수만 개의 기사가 쏟아졌고, 그 기사 중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지 모르는 혼돈이었다. 가짜가 진짜가 되고 진짜가 가짜가 되는 혼란과 혼돈은 블랙홀처럼 수많은 사건과 이슈를 빨아들였다. 일본의 경제 보복을 비롯해 국회 패스트트랙, 국정감사, 국회의원 자식의 음주운전, 전직 국회의원 자녀의 마약 밀수, 북한의 미사일 발사, 화성 연쇄 살인 사건, 미중 무역 전쟁, 아프리카 돼지열병 등 세상을 놀라게 하고 뒤집을 만한 사건들이 장관 임명과 함께 묻혔다. 

도대체 법무부 장관이 뭐라고, 장관 한 명 때문에 대한민국이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을까? 그리고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죽기 살기로 덤벼들며 그의 가족까지 할퀴고 짓밟아야 했을까? 

아버지로서 그리고 남편으로서 가족이 난도질당하는 건 참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66일 만에 신임 장관은 전임 장관이 됐다. 그렇다고 사퇴를 주장했던 진영이 승리에 취해 축배를 들이켜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어쩌면 법무부 장관을 겨냥했던 칼날이 그들을 겨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석연치 않은 씁쓸한 결과가 이 사회에 던져졌다. 무엇이 옳은지도 모르고 무엇이 그릇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광화문에서 ‘사퇴’를 부르짖었던 이들과, 서초동에서 ‘개혁’과 ‘수호’를 외쳤던 이들도 모를지 모른다. 씁쓸하다. 

모터트렌드 × 다음 자동차 익스피리언스 데이를 무사히 마쳤다. 이 행사를 위해 지난 몇 달간 수많은 사람이 열심히 준비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잘될 수 있을까?’ 하는 순간도 많았다. ‘그냥 하지 말까? 이거 한다고 회사에서 보너스를 주는 것도 아니잖아.’ 이런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시작했고 이미 많이 진척된 상황이니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행사 준비는 지난해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인데, 기획을 착실하게 쌓아나가는 책을 만드는 과정과는 달리, 행사는 새로 생기는 문제점을 지워나가는 게 중요하고 어렵다. 그래서 힘들었을 것이다.  

어찌어찌해서 행사가 시작된 후에도 걱정은 계속됐다. 혹시 모를 사고 때문이다. 차가 방호벽을 뚫고 나가는 건 아닌지, 참가자가 드리프트 도중에 구조물을 들이받는 건 아닌지, 갑자기 타이어가 펑크나 차가 스핀하는 건 아닌지 한나절 동안 안절부절못했다. 그리고 모든 행사가 끝나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면서 숨 쉬는 게 한결 쉬워졌다. 

많은 참가자가 내게 와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런 행사 기획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재미있었어요” “밥이 정말 맛있네요” 등 모두 함박웃음으로 만족해하며 악수를 청했다. 그들이 내민 손을 잡으며 지난 몇 달간 힘들게 준비했던 피로가 날아가는 것 같았고, 편집장직에서 가장 뿌듯한 순간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이런 좋은 기분은 며칠 가지 못했다. 

회사 임원 입장에선 행사 의미와 내용이 중요한 게 아니라 ‘돈이 얼마나 많이 남았느냐’가 더 중요했다. 수익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행사 자체의 의미는 뒷전이고, 수치적 결과만이 행사를 평가하는 절대적 잣대였다. “익스피리언스 데이는 돈을 벌기 위한 행사가 아니라 <모터트렌드> 브랜드 가치를 높이며 독자와 경험을 공유하고 소통하는 행사다. 차후 횟수가 쌓이면 문화 콘텐츠 사업으로 육성할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숫자가 아닌 말과 언어는 철옹성 앞에서 설득력을 잃었다. 

사실, 지난해 첫 번째 행사를 치르고 “더 이상 익스피리언스 데이를 하지 않겠다”고 회사에 선포했다. 지난해 익스피리언스 데이를 해보니 <모터트렌드>를 이끌면서 행사까지 준비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어렵고 힘에 부쳤다. 또 행사는 수익을 내기 힘든 구조라는 것도 알게 됐다. 그래서 하고 싶지 않았다. 달리 생각하면 지독히 이기적인 자기방어적 자세다. 하지만 내 입장에선 힘만 들고, 회사 입장에선 돈도 안 되는 행사니 더 이상 지속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올해 중순부터 익스피리언스 데이 이야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돈도 안 되는 걸 왜 다시 하라는 겁니까?”라며 완강하게 뻗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설득과 회유에 넘어가 익스피리언스 데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게 행사가 열렸다. 그런데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매출에 비해 수익이 미미했다. 역시 행사로는 돈을 벌기 쉽지 않음을 확인했고, 또다시 핀잔 아닌 핀잔을 들었다.  

신임 장관은 업무적 역량으로 평가받을 받을 새도 없이 들쑤시고 파헤쳐진 가족 의혹으로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나를 비롯해 많은 국민이 그 모습을 보며 씁쓸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그가 장관직에서 물러나던 날은 익스피리언스 데이를 무사히 마친 우리 팀의 뿌듯함이 씁쓸함으로 바뀐 날이었다. 

장관 사퇴와 돈 못 버는 익스피리언스 데이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한 가족에게 가해진 비상식적인 폭력에 속이 상하고, 이윤적 논리 앞에 의미의 중요성을 내세울 수 없는 무력감에 속이 상한다. 이래저래 씁쓸한 10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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