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수가 그 책의 가치를 가늠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나는 기사를 빨리 쓰는 기자였다. 얼마나 빨랐냐면 하루에 9개의 기사를 쳐낸 적도 있다. 당시 편집장은 칭찬 대신 화를 냈다(지금의 나라도 그럴 것 같다). 일을 한꺼번에 주지 말라는 뜻이었다. 몇 달 동안 책을 거의 혼자 만든 적도 있다. 기자가 고작 두 명이었는데, 선배가 해고당하면서 150페이지의 분량을 편집장과 둘이 만들었다. 당시 난 모든 에너지를 손끝에 모아 초인적인 속도로 원고를 썼고, 책을 정해진 날짜에 발간했다(두 달 후 폐간했다).
원래 글을 빨리 쓰는 편이 아니었다. 주어진 환경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 월간지는 언제나 정해진 날짜에 책을 내야 했고, 난 그 정해진 시간에 원고를 완수했을 뿐이다. 그렇게 십수 년간 월간지에서 일하다 보니 시간과의 경쟁에 익숙해졌고, 언제부턴가 난 항상 시간 앞에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날 ‘조급증’이라 불렀다.
예전엔 잡지가 지금보다 훨씬 더 두꺼웠다. 책의 두께가 곧 잡지사 경쟁력이었기 때문다. 두꺼워야 잘 팔리는 책으로 여겼고 그래야 더 많은 광고주에게 어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돈을 받지 않는 ‘대포 광고’가 많았고 (지금도 있다) 기사로 페이지를 채웠다. 당연히 기자들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잡지사는 매달 콘텐츠를 공장처럼 찍어내며 기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했다. 야근은 필연적이고 철야는 당연했다.
2019년의 잡지사들은 책을 무조건 두껍게 만들지 않는다. 예전처럼 광고가 많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콘텐츠 하나하나를 공들여 생산하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비디오의 득세로 잡지사는 그 영향력과 자생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속도와 생산량에서 디지털을 당해낼 수 없으니, 차별화한 콘텐츠로 독자와 소비자 그리고 광고주에게 어필해야 하기에 콘텐츠 양이 아닌 질에 사활을 건다. 그래서 콘텐츠 하나하나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이고 더 깊이 생각한다. 즉 예전엔 페이지가 기자 업무량의 척도였는지 몰라도, 지금은 페이지로 업무량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참고로 잡지의 가치(콘텐츠의 질)는 기자의 수와 비례할 확률이 높다. 무조건 두꺼운 책을 고르기보다는 판권에 얼마나 많은 기자가 있는지 확인하는 게 그 책의 가치를 가늠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런 책을 사서 보고 그런 책에 광고하는 게 좀 더 가치 있는 소비이자 투자다.
지난해 편집장이 되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중점을 둬야 하는 일은 에디터들이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에디터들이 예전의 나처럼 시간과 경쟁하듯 일하기보다는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사고하며 일하길 바랐다. 그래야 더 좋은 콘텐츠를 기획하고 생산해 결과적으로 <모터트렌드>가 콘텐츠의 홍수 속에서도 경쟁력을 잃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편집장이 되자마자 페이지 밀도를 줄이는 방법으로 에디터들의 업무량을 줄였다(그래 봤자 원고량이 약간 줄었을 뿐이다). 그래서 에디터들 행복해졌을까?
<모터트렌드> 에디터들은 여전히 야근과 철야를 한다. 야근 금지령을 내려도 해가 지고 달이 떠도 집에 가지 않는다. 일의 노예가 된 건지, 아니면 예전의 나처럼 시간의 노예가 된 건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 있다. 확실한 것도 있다. 업무량이 줄어도 매달 보판(원고 미작성)을 내는 놈은 똑같이 보판을 만든다. 그렇다면 콘텐츠 질은 높아졌을까? <모터트렌드> 콘텐츠 생산자 입장에서 우리가 우리를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가 만든 책과 콘텐츠가 부끄럽진 않다는 것이다.
<모터트렌드> 콘텐츠가 독자와 소비자 그리고 관련 업계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2020년부터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뉴스 콘텐츠 검색에서 <모터트렌드>를 볼 수 있게 됐다. 네이버에서 뉴스를 검색하면 여러 언론사의 기사가 나오는데, 한국의 모든 언론사가 나오는 게 아니라 네이버와 카카오에서 위임받은 뉴스제휴평가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한 곳만이 검색 리스트에 오른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게 있다. 뉴스제휴평가위원회의 평가 항목은 크게 정량평가와 정성평가로 나뉘는데, 정량평가에 20%, 정성평가에 80%의 배점을 둔다. 즉 기사의 양보다는 저널리즘의 품질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고, <모터트렌드>는 그들의 조건을 만족했다는 의미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예전엔 잡지사들이 콘텐츠 양으로 승부했다. 그게 당연했고 그게 잘 먹혔다. 그런데 지금은 잡지사가 양으로 승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입장도 아니다. 이제는 필연적으로 콘텐츠 하나하나에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여야 한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참신하고 창의적인 기획을 하고 그 기획을 페이지에 명확하게 담아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
그런데 2019년의 마지막 책을 만드는 지금, <모터트렌드> 에디터들은 올해 가장 많은 양의 일을 하고 있다. 지난 6월 한 명이 퇴사한 후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했고, 지난달엔 에디터 한 명이 해외로 이민을 갔다. 여섯 명이 하던 일을 네 명이 하고 있다. 디지털 팀 두 명도 책 만드는 일에 투입돼 디지털 콘텐츠 생산량이 줄었다. 결과적으로 질보다는 양으로 일하고 있다.
콘텐츠 제작자를 노예처럼 굴리고 콘텐츠를 공장처럼 찍어내서는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에디터들에게 미안하고 독자들에게 부끄럽다. 다행히 참신하고 능력 있는 인력이 입사를 앞두고 있으니 일시적 공장형 가동을 곧 멈출 수 있다. 더불어 <모터트렌드>가 양이 아닌 질적 성장을 이루도록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할 것이다. 그게 편집장이 해야 할 일이고 <모터트렌드>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