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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Jan 03. 2020

#21. 쓸모없는 인간

이동의 주체인 인간이 주체적 역할을 못 하는 시대가 온다 

당혹스러웠다. 포르투갈에서 열린 폭스바겐 골프 미디어 시승 이벤트에서 옆자리에 앉은 다른 매체의 선배와 난 이 차의 라디오를 켜지 못했다. 골프에 처음으로 하만카돈 고급 오디오가 들어갔으니 음악을 들어봐야 하는데, 도대체 라디오를 어디서 켜야 하는지 찾을 수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차엔 오디오를 비롯해 자주 쓰는 에어컨도 모두 모니터를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날로그 시대를 살았고 매달 종이책을 만드는 나는 아직까지 다이얼과 스위치, 버튼이 편하다. 그런데 이 작은 차엔 이런 컨트롤러들이 전혀 없다. 라디오를 켜기 위해서 8.25인치 모니터를 터치하고 드래그하는 일을 여러 번 해야 한다.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터치를 하는 건 불편하다. 이건 익숙하고 안 하고의 문제를 떠나서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요즘 자동차 메이커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대시보드에 큰 디스플레이 패널을 넣고 모든 컨트롤러를 이곳에 집중시키고 있다. 대시보드가 깔끔하고 실내를 최첨단 분위기로 만든다. 소비자 입장에서도 그럴싸해 보이는 아이템이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이 모든 게 제조 단가를 낮추기 위한 방법이다. 

우리가 지금 타는 차를 보자. 볼륨 다이얼과 온/오프 버튼을 비롯해 각종 물리적 컨트롤러가 모여 있는 대시보드는 모든 게 돈이다. 다이얼 하나하나를 디자인하고 소재를 선택하고 스프링 감쇄력과 조작감도까지 염두에 둔다. 이 컨트롤러들을 하나 납품받아 공장에서 조립하고, 이 조립된 어셈블리가 다시 최종적으로 자동차 조립 공장으로 넘어가 대시보드 안으로 들어간다. 

반면 이 모든 걸 모니터 안에 넣는다고 생각해보자. 버튼 하나하나를 디자인할 필요도 없고 조립할 이유도 없다. 스프링을 고르지 않아도 되고 조작감을 높이기 위해 테스트도 할 필요가 없다. 그저 LCD 패널 안에 이 모든 걸 넣고 소프트웨어만 잘 만들면 된다. 더욱이 디스플레이 패널 값은 점점 내려가고 있으니, 자동차 제조사 입장에선 대시보드에 디지털 디스플레이 패널을 넣는 게 이득이다. 요즘 한창 바뀌고 있는 디지털 계기반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럼 소비자는 어떤 이득을 얻게 될까? 자동차 제조 단가는 판매 단가와 직결된다. 제조비를 낮출수록 차값은 더 낮아질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신형 모델이 나왔을 때 차값이 더 낮아진 경우는 거의 없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언제나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 상승 등을 앞세워 이전보다 더 비싸게 판다. 골프도 이전보다 조금 더 비싼 가격에 판매될 것이 뻔하다. 

“모든 컨트롤이 모니터를 통해야 하니 불편하네요. 이는 안전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아요.” 행사장에 있던 독일인 전문가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그 나이 지긋한 양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대화형 음성명령 시스템을 넣었습니다. 아마존의 AI 시스템 알렉사는 현재 가장 진보한 시스템입니다. 더불어 업데이트도 아주 쉽죠. 직접 사용해보세요. 편하게 느끼실 겁니다.”

예전에도 음성명령 시스템은 있었다. 하지만 아주 기본적인 것만 수행할 뿐이고 이 또한 시스템이 원하는 발음과 성량으로 말해야 인식하는 정도여서 잘 쓰지 않았다. 또 자동차에게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탐탁지 않았다. 

“Hello, Volkswagen. Would you show me the supermarket nearby?” 영어가 불편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강변 외딴곳에 위치한 호텔에서 간단한 요깃거리와 음료를 사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라디오도 켜지 못하는데, 내비게이션에서 가까운 슈퍼마켓을 찾는 건 언감생심이다. 게다기 여긴 영어권 국가도 아닌 포르투갈 아닌가. 그런데 나의 질문에 컴퓨터가 내가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곳의 슈퍼마켓으로 인도하기 시작했다(물론 두세 번의 시행착오가 있기는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기아의 신형 K5 시승회에서 다시 한번 대화형 음성인식 시스템을 만났다. 음성시스템이 들어갔다는 건 이 차도 디스플레이 패널을 통해 컨트롤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행히 K5는 자주 쓰는 에어컨은 따로 뺐다. 카카오가 만든 K5의 음성인식 시스템도 골프와 마찬가지로 차내 여러 기능을 수행한다. 창문도 여닫고 운전대와 시트 열선, 뒷유리 열선까지 제어할 수 있다. 로또 번호까지 추천해준다. 

난 아직 아날로그를 살고 있는데, 요즘 새로 출시되는 차들은 모두 디지털 시대의 문물들이다. 다이얼을 돌리고 버튼을 누르던 시대는 저물고 그 자리는 터치와 드래그가 대신한다. 이도 귀찮으면 말하면 차가 알아서 해준다. 

지금도 적응이 쉽지 않은데, 자동차는 더 많은 디지털 시대의 이기를 빠르게 취하고 있다. 이미 골프와 K5는 환경이 갖춰진 상태에서 일정 시간 동안 운전을 대신해준다. 인간이 차에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운전이었는데, 이젠 자동차가 운전하는 시대이니 이동을 위한 인간의 필요성이 점점 줄고 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인간 없이도 환경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자동차 스스로 주행하는 시대가 온다. 자율주행이 아닌 진정한 ‘무인차’ 시대. 말 그대로 인간이 없어도 되는 시대다.

인간의 편의를 위한 시스템에서 인간이 점점 소외되고 있다. 이동의 주체인 인간이 주체적 역할을 못 하고 종래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시대가 된다. 이렇게 인간의 쓸모가 줄어들고 있다. 

버튼과 다이얼이 편한 나는 점점 디지털화되는 자동차가 어렵다. 십수 년간 책만 만든 나는 디지털 콘텐츠로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자동차에서 인간의 쓸모가 옅어지는 것처럼, 나도 이 사회에서 가치와 역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음을 느낀다. 디지털 시대는 디지털 세대를 위한 무대다. 그 무대의 주연을 빛나게 하는 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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