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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우 Feb 27. 2020

#22.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

착실하고 결연하며 때로는 처절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꿈을 이뤘다

쉐보레 콜벳은 언제나 큰 엔진을 앞에 얹고 뒷바퀴를 굴리는, 전형적인 롱노즈 쇼트데크 스포츠카였다. 아메리칸 머슬카의 전형이고, 미국 스포츠카의 자존심이다. 그런데 이 차는 뒤를 털면서 불안정한 모습으로 출발했고, 코너에선 뒤가 앞을 추월하는 일이 빈번했다. “콜벳은 직진을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은 이 차를 사랑했다. 그렇게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콜벳은 수컷들의 가슴을 간질이고 뇌를 조종했다. 그런데 8세대 콜벳은 엔진이 뒤에 있다. 노즈는 극도로 짧아졌고 뒤는 높아졌다. 이젠 어딜 봐도 머슬카가 아니다. 우리가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슈퍼카의 모습이다. 쉐보레는 60년이 넘는 콜벳의 역사와 전통을 버리고 C8을 미드십으로 만들었다.  

최근 현대차는 날 두 번 놀라게 했다. 하나는 제네시스 GV80다. 나는 일찍이 이렇게 고급스러운 국산 SUV를 본 적이 없다. ‘디자인과 만듦새만 놓고 보면 롤스로이스에 크게 뒤지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한계 없이 돈을 쓰는 롤스로이스의 부품과 소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롤스로이스가 생각날 정도니 그만큼 고급스럽게 잘 만들었다는 뜻이다. 한국인에게 SUV는 실용성과 편의성으로 타는 차였는데, GV80가 이런 인식에 수직의 파문을 가했다. 또 다른 놀라움은 현대차 고성능 부서가 연구 중인 RM19다. 이달 122페이지를 보면 알겠지만 RM19는 현대차가 준비하는 미드십 스포츠카다. 준비한다고는 하지만 아직 생산이 결정된 단계는 아니고 연구 중이라고 한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포드 V 페라리>를 재미있고 흥미롭게 관람했다. 레이싱 팬이자 자동차 기자로서 캐럴 셸비에 대해 많이 읽고 많이 써본 터라, 영화의 배경과 등장인물의 몸짓, 대사 하나하나까지 눈과 귀에 콕콕 박혔다. 영화적 재미를 위한 약간의 과장, 극적 효과를 위한 스토리 각색이 있었지만, 과거 포드와 페라리의 미묘한 관계를 잘 묘사했다. 

쉐보레와 현대차 그리고 캐럴 셸비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각자 꿈꾸는 바가 있었고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착실하고 결연하며 때로는 처절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꿈을 이뤘다.

지난 60여 년간 콜벳은 엄청난 출력을 뽐냈지만 슈퍼카라는 칭호와는 거리가 멀었다. 고속으로 코너를 달릴 때는 무거운 앞이 횡중력을 많이 받아 섀시가 비틀어질 수 있다. 그래서 더 강한 섀시가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무거워진다. 앞이 무겁다는 건 뒤가 가볍다는 말이다. 뒤가 잘 흐르고 미끄러지는 이유가 된다. 반면 가장 무거운 엔진을 가운데 얹으면 코너에서 중력이 가운데로 몰린다. 뒤가 흐르고 앞이 빠지는 불안정한 움직임을 줄일 수 있다. 쉐보레가 이걸 몰라서 엔진을 앞에 얹었을까? 그들은 콜벳의 정통성을 이어가면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FR의 구조적 한계를 기술만으로 극복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콜벳의 경쟁자인 포드 GT는 전통적으로 엔진을 미드십에 얹으면서 ‘미국산 슈퍼카’로 불렸다.미드십의 장점을 고스란히 살리면서 각종 레이싱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뒀다. 콜벳은 엔진을 뒤에 얹은 포르쉐 911보다 언제나 출력이 높았지만 뉘르부르크링 랩타임은 늘 911에 뒤졌다. 콜벳은 지난 2016년부터 내구 레이스에 복귀했지만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하다. 포르쉐 911, 포드 GT, 페라리 488 등 엔진을 시트 위에 얹은 경주차들에게 밀렸기 때문이다. 

쉐보레가 8세대 콜벳을 미드십으로 만든 이유는 경쟁자들을 이기겠다는 꿈 때문이다. 높은 출력을 고스란히 아스팔트에 쏟아내기 위해선 구조적 변화가 필요했다. 이미 미드십 콜벳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20 <모터트렌드> 올해의 차와 북미 올해의 차를 석권했다. 미국판 <모터트렌드>는 콜벳에서 슈퍼카 칭호가 아깝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건 콜벳이 FR을 버리고 MR이 됐는데 미국 자동차광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는 것. 그들은 쉐보레의 속도에 대한 열망과 경쟁차를 앞서겠다는 꿈과 의지를 응원하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자동차 역사에서 (테슬라 다음으로) 가장 빠르게 성장한 기업 중 하나다. 포드와 미쓰비시에서 엔진 등 주요 부품을 사서 차를 만들기 시작했고, 경제성 좋은 싸구려 차를 생산해 돈을 벌고 이제는 차를 많이 파는 세계인이 모두 아는 기업이 됐다. 고급 브랜드도 론칭했다. 그렇게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고급 브랜드에 대한 현대차의 꿈과 열망은 꽤 긴 시간이 걸려 이뤄졌지만, 현대차는 그렇게 ‘럭셔리’라는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GV80를 세상에 선보였다. 최고급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현대차의 꿈이 비로소 제네시스에서 영글었다. 

현대차는 또 다른 꿈을 꾼다. 바로 미드십이다. 현대차가 미드십 스포츠카를 개발한다는 이야기는 몇 년 전부터 들려온 터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 소식이 뜸했는데, 갑자기 RM19가 세상에 나타났다. 개발과정을 알버트 비어만이 이끌고 있단다. 미국과 영국 기자를 독일 뉘르부르크링까지 불러 시승 후 차에 대해 인터뷰까지 한 것으로 보면 그저 연구용으로만 만든 건 아닌 듯 보인다. 팔지 않을 것을 굳이 연구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럭셔리와 고성능은 현대차가 오랜 시간 공들이고 꿈꿔온 단어다. 현대차의 꿈이 실현되기 바란다. 

레이서였던 캐럴 셸비는 르망 24시간 내구 레이스 우승을 위해 경주차를 만들었다. 켄 마일스는 챔피언을 꿈꿨고, 포드는 절대 강자 페라리를 넘겠다는 일념으로 투자했다. 그렇게 3개의 꿈이 시너지를 내며 불가능이 가능이 됐고 오랫동안 회자되는 스토리가 만들어졌으며, 먼 훗날 영화까지 제작됐다.

지금의 자동차 세상은 수많은 꿈이 모이고 쌓여 이뤄진 세상이다. 오늘 나를 놀라게 한 증강현실 내비게이션도 누군가의 꿈에서 시작됐을 것이며, 현실이 된 전기차와 점점 가까워지는 자율주행 세상도 꿈을 이루고자 하는 거룩한 노력이 일궈낸 성과다. 꿈이 자동차 시대를 이끌었고 꿈이 새로운 자동차 시대를 창조하고 있다. 

나에겐 <모터트렌드>를 잘 만들고 이끄는 꿈이 하나 있다. 소박하지만 매우 어려운 꿈이다. 해야 할 게 많은데 그걸 하려면 더 많은 제약이 따른다. 책임은 큰데 권한은 제한적이다. 그래도 나아갈 수밖에 없다. 꿈이 창조의 기원이며 성장의 동력이다. 꿈이 없으면 정체되고, 정체는 곧 퇴보를 뜻한다. 그렇게 꿈이 없거나 연명이 꿈인 이들을 헤치고 나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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