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트라우마와 마음의 역학
어떤 사건들은 개인이 직접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정서적 지형 속에 오래 남는다. 내가 자란 도시는 매년 5월 18일이 되면 조금 다른 공기를 띠었다. 학교에서는 그 시기에 맞추어 한 역사적 사건을 기념했고, 우리는 교실에서 영화와 사진을 보며 그 사건을 배웠다. 그것은 나의 직접적인 기억이 아니었지만, 슬픔과 애도, 그리고 어떤 윤리적 긴장 같은 감정의 구조는 분명히 다음 세대에게도 전달되고 있었다. 훗날 정신건강을 연구하는 사람이 된 뒤, 나는 박사 연구 주제를 고민하던 시기에 또 다른 집단적 비극이었던 세월호가 한국 사회를 뒤흔드는 장면을 경험했다. 그 사건 이후 사회 전체의 정서적 풍경이 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뉴스 화면 속의 반복되는 장면들, 거리의 상징들, 사람들의 말투와 침묵. 몇 년 뒤, 해외에 머물고 있던 시기에 이태원 참사라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정서적 파장의 양상이 이전의 사건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는 사실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들은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되었다. 사회적 비극은 어떻게 개인의 마음속으로 들어오는가. 그리고 그 과정은 단순히 개인의 외상 경험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몇 년 전부터 제주 4.3 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회복탄력성을 측정하고, 그 일을 겪은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조사하는 일에 관여하게 되었다. 책을 읽고, 문헌들을 추리고, 통계수치를 확인하면서 나는 다시 나를 관통했던 수많은 역사적 트라우마에 대해서 되뇌게 된다.
역사적 트라우마(historical trauma)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교적 직관적인 개념이다. 집단적 폭력이나 식민 지배, 학살, 강제 동화 같은 역사적 사건이 공동체의 삶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 상처가 세대를 넘어 사람들의 정신건강과 사회적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은 많은 경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 개념을 실제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순간 상황은 훨씬 복잡해진다.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정신건강 사이에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관계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은 실제로 인과적 관계인가, 아니면 현재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만들어낸 해석의 틀인가. 역사적 트라우마 연구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바로 이 질문 사이에서 발전해 왔다.
이 개념이 처음 학문적 언어로 정식화된 것은 북미 원주민 연구에서였다. 식민지 지배, 토지 상실, 기숙학교 제도(residential schools), 강제 동화 정책과 같은 경험은 단순히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의 삶의 방식과 문화적 구조 자체를 급격하게 흔들었다. 이러한 역사 이후 원주민 공동체에서 높은 수준의 자살, 물질 사용 문제, 우울 같은 정신건강 문제가 보고되었고, 많은 연구자들은 이를 단순히 개인의 취약성이나 현재의 사회경제적 조건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역사적 폭력과 문화적 파괴의 경험이 공동체의 삶 속에 깊이 남아 있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현재의 건강 문제와 연결되어 있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이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직관이 연구의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어려움이 시작된다. 초기 역사적 트라우마 연구는 종종 조부모나 부모 세대가 특정 정책의 피해를 경험했는지 여부를 변수로 설정하고, 그것이 후손 세대의 정신건강과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지를 분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가족 중 누군가가 기숙학교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 혹은 특정 식민 정책의 직접적인 피해를 경험했는지 여부가 연구 변수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접근은 분명 중요한 출발점이었지만 동시에 역사적 경험의 복잡성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는 비판도 피하기 어려웠다. 조부모가 기숙학교에 다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경험의 폭력성과 상실의 정도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그 경험이 가족 내에서 어떤 방식으로 기억되고 전달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어떤 가족에서는 그 사건이 반복적으로 이야기되며 공동체 서사의 일부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다른 가족에서는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었을 수도 있다. 이런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역사적 경험을 단순한 변수로 환원하는 연구는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개념을 과학적 설명이라기보다 하나의 은유에 가깝게 만들 위험이 있었다.
이러한 비판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적 트라우마(Indigenous historical trauma) 연구는 집단 수준의 추상적 설명이나 조상 경험의 단순 proxy 측정에서 벗어나, 역사적 경험이 가족 내 의사소통, 차별 지각, 정체성 중심성, 위협 평가, 공동체 기억과 같은 사회적·심리적 경로를 통해 다음 세대에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집단 수준의 추상적 설명에서 벗어나 실제로 역사적 경험이 어떤 사회적 경로를 통해 다음 세대에게 전달되는지를 탐구하려는 시도가 등장한 것이다. 특히 가족 계보 수준에서 기억과 감정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살펴보는 연구들은 인상적이었다. 어떤 가족에서는 역사적 경험이 증언과 이야기의 형태로 반복적으로 전달되며 공동체의 기억을 형성하고, 어떤 가족에서는 오히려 침묵과 회피의 형태로 남았다. 이러한 기억의 양식은 단순한 내러티브의 차이가 아니라 다음 세대의 정서 경험과 정체성 형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 트라우마 연구는 점점 더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는 질문뿐 아니라 “그 일이 어떻게 기억되고 이야기되는가”라는 질문을 함께 다루게 된다.
시간이 흐르며, 과거 사건 자체의 인과적 영향과 현재의 의미화 과정을 보다 신중하게 구분하려는 시도가 뒤따랐다. 사람들이 역사적 사건을 떠올릴 때 경험하는 감정은 반드시 그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현재의 정치적 상황, 교육, 미디어 재현, 공동체 담론과 같은 다양한 요소와 상호작용하면서 형성될 수 있다. 마치 1980년에는 태어나지 않은 내가 계속해서 사진과 비디오를 통해서 광주의 5월을 접했던 것처럼 말이다. 역사적 사건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 속에서 반복적으로 해석되고 재구성된다. 어떤 사건은 오랫동안 침묵 속에 머물러 있다가 특정한 정치적 계기를 통해 다시 공론화되기도 하고, 어떤 사건은 반복적인 기념 의례와 교육을 통해 공동체 정체성의 핵심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기억이 단지 슬픔이나 상처의 감정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동체는 특정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 자신들이 어떤 일을 겪어온 사람들인지, 무엇이 부당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집단적 폭력의 기억은 과거의 고통을 기록하는 작업일 뿐 아니라, 공동체가 자신의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초기 역사적 트라우마 연구는 주로 고통과 질병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연구자들은 점점 더 resilience, 즉 공동체의 회복탄력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극심한 역사적 폭력과 문화적 파괴를 경험한 공동체가 여전히 문화적 관계와 사회적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병리적 설명만으로는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적 관계와 문화적 실천이 공동체의 회복을 가능하게 했는지, 그리고 이러한 회복의 과정이 다음 세대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질문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
정신건강의 관점에서 보면, 역사적 트라우마는 반드시 특정한 정신질환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정서적 긴장, 공동체에 대한 감각, 혹은 국가와 사회에 대한 신뢰의 문제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동체의 기억이 상처의 반복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공동체적 연대와 회복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역사적 사건은 단지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기억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사람들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윤리적 상상력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연구해야 하는 제주 4.3의 정신건강 문제는 단순히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현재의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남겼는지를 밝히는 작업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 폭력이 한 지역의 사회적 관계와 정서적 풍경 속에 어떻게 남아 있으며, 그 기억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어떤 감정과 의미로 경험되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제주에서는 오랫동안 4.3이 침묵 속에 존재했다. 많은 가족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하지 못했고, 사건은 가족 내부의 기억으로만 조심스럽게 전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증언과 기록이 등장하고 기념 공간과 추념 의례가 만들어지면서, 4.3은 다시 사회적 기억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과거를 복원하는 과정이라기보다 현재의 삶 속에서 그 사건의 의미가 새롭게 구성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제주 4.3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연구한다는 것은 단지 “그 사건이 현재의 정신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그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으며, 그 기억이 현재의 삶 속에서 어떤 감정과 의미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어떤 사람들에게 4.3은 여전히 가족의 침묵 속에 남아 있는 슬픔일 수 있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공동체의 정의와 평화를 이야기하는 윤리적 기억일 수도 있으며, 또 다른 이들에게는 사건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논쟁이 현재의 피로와 불안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감정의 층위 속에서 역사적 트라우마는 단순한 병리적 개념이라기보다 공동체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복합적인 사회적 경험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내가 마주하여야 할 4.3, 5.18, 그리고 많은 역사적 트라우마와 정신건강의 연구도 바로 이 복잡성을 이해하는 일에서 출발할 것이다.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삶에 남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관계를 단순한 인과관계로 환원하지 않는 일. 고통을 기록하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의 회복력과 의미 형성의 과정을 함께 바라보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역사적 기억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를 섬세하게 관찰하는 일. 제주 4.3을 비롯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연구한다는 것은 결국 이러한 질문을 통해 과거와 현재 사이의 보이지 않는 연결을 이해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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