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함이라는 이름의 감각

by Epiphanes

다른 문화를 접할 때 우리가 느끼는 불편함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누군가의 행동이 명백히 잘못되어서 생기는 감정이라기보다는 내가 당연하다고 믿어 온 기준이 흔들릴 때 나타나는 반응에 가깝다. 우리는 보통 그 기준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너무 오래, 너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어 그것이 하나의 선택이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그래서 문화적 차이는 흔히 ‘이해의 문제’로 설명되지만, 실제로는 ‘감각의 문제’에 더 가깝다. 머리로는 다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몸은 쉽게 납득하지 못한다. 익숙함에서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설명보다 먼저 불편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종종 상대의 무례함이나 비합리성으로 번역된다.


이런 반응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다. 누구나 자신이 속한 문화 안에서 형성된 예의와 청결, 상식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 기준이 보편적이라고 착각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다른 문화와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 기준이 하나의 선택지였음을 깨닫게 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식사 중에 음식을 씹는 소리에 비교적 둔감한 편이다. 물론 예의에 대한 기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리 자체가 곧바로 혐오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반면 서양권에서는 이 소리에 매우 민감하고 누군가 소리를 내며 음식을 먹는 것만으로도 강한 불쾌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그 반대의 사례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식사 자리에서 코를 푸는 행동이 큰 무례로 여겨지지만 서양권에서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생활 공간에 대한 인식 역시 크게 다르다. 한국에서는 집에 들어오면 신발을 벗는 것이 거의 자동적인 규칙처럼 자리 잡고 있다. 바닥은 단순히 걷는 표면이 아니라, 앉고 눕고 생활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반면 일부 서양 문화권에서는 밖에서 신던 신발을 그대로 신고 집 안을 오가는 것이 자연스럽고 소파나 침대 위로 올라가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한국에서 신발 끈을 느슨하게 묶는 습관과 서양에서 발을 단단히 고정하도록 끈을 꽉 조여 묶는 방식의 차이 역시 이런 인식의 연장선에 있다.


청결에 대한 기준은 또 다른 당혹감을 만든다. 한국에서는 설거지를 할 때 음식물 찌꺼기를 제거하고 세제를 사용한 뒤 반드시 흐르는 물로 헹궈 잔여 세제를 씻어 낸다. 반면 서양권에서는 싱크대에 물을 가득 받아 세제를 풀고 그 물에서 식기를 닦은 뒤 별도의 헹굼 없이 마른 행주로 물기를 제거하는 방식이 흔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러워지는 물과 행주를 그대로 사용하는 모습은 한국인의 기준에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감각의 경계는 국경을 넘어야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기준을 공유하고 있다고 믿는 사회 안에서도, 그 경계는 쉽게 갈린다. 같은 한국 사회 안에서도 식탁의 풍경은 집안마다 다르다. 밥과 국이 중심이 되고 반찬이 곁들여진다는 구조는 비슷하지만, 반찬을 먹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어떤 집은 반찬통을 그대로 식탁에 올려 먹고 다시 냉장고에 넣는다. 어떤 집은 반찬통에서 소량만 덜어 작은 접시에 담아 먹는다.


이처럼 하나하나 따져보기 시작하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 온 기준은 놀랍게도 비일관적이다. 예컨대 반찬을 덜어 먹는 집에서도 찌개만큼은 여러 사람이 같은 냄비에 숟가락을 넣어 떠먹는 경우가 많다. 반찬통의 청결은 신경 쓰면서도, 찌개 국물에 여러 사람의 숟가락이 닿는 상황은 문제 삼지 않는다. 무엇을 위생의 문제로 인식하고, 무엇을 그렇지 않다고 넘기는지는 일관된 원칙보다는 관습과 익숙함에 의해 결정된다.


사람들이 낯선 문화에 대해 공격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이 비일관성을 논리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익숙한 질서가 깨질 때 느끼는 생소함과 기존 가치관과의 충돌 때문이다. 문제는 행동 그 자체보다, 그 행동이 내가 당연하다고 믿어 왔던 전제를 흔들 때 발생한다.


그렇다고 이런 불편함이 언제나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혐오스럽게 느껴졌던 것도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점차 익숙해진다. 외국인들에게 처음 접한 김치의 냄새, 김의 향, 참기름의 풍미는 누군가에게는 강한 거부감으로 다가오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심지어 좋아하기도 한다. 그 음식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변한 것이다.


반대로 한국 사회 안에서도 한때 당연하게 여겨졌던 기준이 점점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과거에는 별다른 문제로 인식되지 않았던 지나치게 개인적인 질문들은 이제 사생활 침해로 받아들여지고 식사 중 나는 소리에 대해서도 점점 더 민감해지고 있다.이는 어느 한쪽 기준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라는 것이 끊임없이 접촉하고 조정되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지구 반대편의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외부인이 된 자신이 진정한 환대를 받는다고 느끼는 순간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전혀 다른 문화를 지녔음에도 그 안에서 자신의 문화와 결이 비슷한 지점을 발견했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현지인들이 외부인의 문화를 기꺼이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여 줄 때다. 환대는 차이를 지우는 데서가 아니라, 차이를 전제로 한 채 함께 머물 수 있다는 신호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지점을 떠올리면, 우리가 외부인의 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답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새로운 문화를 접할 때 필요한 태도는 불편함을 없애려고 노력하기보다 그 불편함을 해석하려고 시도해 보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당연하게 배워 왔는지, 어떤 기준 위에서 불쾌함을 느끼는지 돌아보는 일 말이다. 존중이란 모든 것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준 역시 특정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 만들어졌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문화적 충돌은 흔히 타인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실은 나 자신을 더 또렷하게 드러내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낯섦 앞에서 판단을 잠시 멈추고, 그 낯섦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는 것. 어쩌면 그것이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가장 현실적인 태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