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철학관 차릴 거야?”
대학 시절, 철학과 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농담이다. 말한 사람에게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가볍게 웃자고 던진 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그 한마디는 철학이 어떻게 오해되는지를 이상할 만큼 정확하게 드러낸다. 철학은 ‘사유의 훈련’이 아니라, 현실과 동떨어진 신비주의나 말장난의 영역으로 오해되는 경우가 잦다. 나는 그 오해가 단지 무지에서만 생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철학이 오해되는 데에는 어떤 구조가 있다. 한국에서 전공은 쉽게 직업으로 번역된다. 그래서 철학은 “그래서 뭘 할 건데?”라는 질문 앞에서 자주 멈칫한다. 철학이 무엇을 훈련하는지 설명하기 전에, 그 전공이 만들어 낼 ‘직업명’을 먼저 요구받는다. 그 결과 철학과 학생들은 복수전공을 택한다. 윤리과나 교직처럼 제도 속에서 인정되는 트랙을 함께 붙여서, 철학이 현실로 들어갈 통로를 확보한다. 이 선택은 철학이 무용하다는 증거가 아니다. 철학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이름을 빌려 살아남는 방식에 가깝다. ‘철학’이라는 이름만으로는 통과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철학은 스스로를 변장한다.
그런데 이 인식은 나라에 따라 결이 다르다. 한국에서는 대학 전공이 곧 직업의 이름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철학은 학부 과정에서부터 곧장 효용을 증명해야 한다. 반면 미국에서는 학부를 ‘직업 훈련’이라기보다 사고와 글쓰기의 훈련 과정으로 보는 전통이 상대적으로 강했고, 실제 직업의 문은 대학원이나 전문대학원에서 본격적으로 열린다는 인식도 있었다. 그래서 철학은 철학자를 만들기 위한 전공이라기보다, 논증과 판단의 훈련으로서 법학이나 정치, 정책 분야 같은 경로에 자연스럽게 붙기도 했다. 물론 이 경계도 고정된 건 아니고, 각 사회는 서로의 방향으로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다만 같은 학문이 한 사회에서는 ‘위험한 선택’으로 다른 사회에서는 ‘기반 체력’으로 읽히는 이유는 결국 대학을 어디에 위치시키느냐의 차이와 닿아 있다.
오해는 학부 전공의 인식 방식에서만 생기지 않는다. 전달 방식에서도 생긴다. 나는 대학에서 ‘철학을 정말 잘하는 사람’과 ‘철학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 전혀 같지 않다는 걸 몸으로 배웠다. 한 교수님은 어떤 철학자의 사상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이해하는 분이었다고 들었다. 학생 시절에는 철학의 천재로 유명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강의실에서 그 천재성은 거의 전달되지 않았다. 설명은 생략이 많았고, 개념은 정의 없이 건너뛰었고 학생들은 어디서부터 길을 잃었는지조차 모른 채 앉아 있게 됐다. 그때의 혼란은 “내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지도 없이 어두운 방에 들어간 느낌에 가까웠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철학이 ‘본래 난해해서’ 오해받는 경우도 있지만 철학이 ‘난해하게 전달되어서’ 오해받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을.
여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이름이 더해지면 오해는 더 단단해진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종종 “진리는 없다”, “다 해석하기 나름이다” 같은 문장으로 축약된다. 축약된 채로 소비되면 철학은 곧바로 상대주의나 말장난이 된다. 하지만 내가 대학에서 만난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런 구호라기보다 어떤 의미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기준이 무엇을 배제하는지 살피는 방식에 가까웠다. 문제는 철학이 아니라, 철학이 너무 쉽게 ‘가벼운 요약’으로 유통된다는 점이다. 요약이 지나치게 가벼워질 때, 철학은 사라진 게 아니라 왜곡된 형태로만 남는다. 결국 오해는 세 갈래로 굳어진다. 철학을 직업으로 번역하려는 오해, 철학을 난해하게 전달하는 오해 철학을 한 줄짜리 구호로 요약해 버리는 오해. 철학 자체가 비어 있어서가 아니라, 철학이 통과하는 통로가 왜곡돼서 철학이 비어 보이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철학을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철학의 방식으로 살고 있다. 어떤 정책이 결정되는 순간을 떠올려 보자. 그 결정이 그냥 저절로 “짠” 하고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결정자들은 스스로 철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지 몰라도, 형평과 효율을 저울질하고 자유와 안전의 충돌을 조정하고, 손해를 누구에게 어떻게 배분할지 정당화한다. 그 과정 자체가 철학의 방식이다. 철학은 정책을 ‘대신’ 결정하는 학문이 아니라 결정이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전제와 기준과 책임의 경계를 드러내는 습관에 더 가깝다. 철학이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철학이 숨겨져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내 직업으로 돌아오면 이 감각은 더 분명해진다. 요즘 나는 번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AI가 네 밥그릇 뺏어갈 거야”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되묻곤 한다. “나만 뺏길 것 같아?” 기술이 한 직업만 겨누는 시대는 거의 없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누가 뺏기느냐’가 아니라, 결과에 누가 책임을 지느냐다. AI가 문장을 더 쉽게 만들어 낼수록, 인간은 더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어떤 문장을 고를지, 어떤 어조를 택할지, 어디서 멈출지. 그리고 그 선택이 정당한지를 사회적으로 납득시키는 책임은 결국 인간에게 남는다. 가능한 선택지가 늘어날수록 판단의 빈도는 늘고, 판단을 설명해야 하는 부담도 커진다. 철학이 필요한 자리는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늘어난다.
철학이 추상이라는 오해를 깨 주었던 수업도 있었다. ‘건축과 철학’ 강좌였다. 수업은 텍스트보다 작품 사진 위주였고, 포스트모더니즘이 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배우며 “공간은 해석의 언어”라는 감각을 익혔다. 특이한 모양의 건축물을 직접 찾아가 사진을 찍고 분석하는 레포트를 쓰기도 했다. 형태, 재료, 맥락을 나눠 읽고, 왜 이런 선택이 이루어졌는지를 설명하는 그 과정은 철학의 방식과 닮아 있었다. 그 과제는 철학이 ‘개념을 다루는 기술’인 동시에 ‘대상을 읽는 기술’이라는 걸 보여 줬다.
이 모든 경험을 돌아보면, 철학이 오해받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철학은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로 자신을 증명하기 어려운 학문이고 교육에서는 종종 암기와 난해함으로 먼저 전달된다. 사회는 전공을 직업명과 동일시하려 들고, 철학이 실제로 작동하는 순간들마저 다른 이름으로 덮어 버린다. 그러니 철학의 자리는 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은 부재가 아니라 은폐다.
그렇다면 필요한 건 철학을 더 ‘거창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철학이 이미 작동하는 자리를 철학이라고 불러 주는 일이다. 교육에서, 직장에서, 정책 논의에서 우리가 실제로 하는 판단을 ‘취향’이나 ‘감’으로 넘기지 않고 전제와 책임의 언어로 다시 써 주는 것.
철학은 바로 그때, 은폐에서 벗어나 자기 이름을 되찾는다.
철학은 정답을 주는 학문이 아니다. 대신 정답이 만들어지는 자리에서 전제를 점검하고, 개념을 구분하고, 책임의 경계를 그린다. 그 습관이 사라지면 정책은 숫자로만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고 기술은 가능과 허용을 구분하지 못한 채 전진하고, 문장은 그럴듯함만 남긴다. 그래서 철학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다움’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철학은 우리가 무엇을 최적화할지, 어떤 피해를 진보라는 말로 덮지 않을지 묻는 언어다. 어쩌면 사람들은 철학을 모르지 않는다.다만 철학을 철학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나중에 철학관 차릴 거야?” 같은 농담이 아무렇지 않게 성립한다. 철학이 삶의 기술로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는, 철학은 직업이 아니라 웃음거리로만 남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그 농담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나는 철학관을 차리지 않았다. 대신 나만의 철학관, 그러니까 나만의 관점을 세우게 됐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기준의 출처를 끝까지 묻는 법을, 적어도 그 습관을 손에 넣었으니까.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게 내가 생각하는 철학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