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함의 대가
방송국 카메라가 멀찍이서 잡은 화면 속, 수십만 개의 LED 촛불이 한꺼번에 움직이고 있었다. 앞에서 시작된 파도타기가 뒤로 전달되며 군중 전체가 하나로 움직였다. 마치 물결이 일렁이는 수면에 햇살이 반사되는 것처럼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성난, 그러나 성숙한 군중이 빚어낸 걸작과도 같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한국의 시위 문화는 정말 멀리 왔고 정말 자랑스럽다고.
그러나 요즘은 다른 생각이 떠오른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누가 무엇을 희생했을까.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의 시위 문화를 보고 ‘성숙하다’고 말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질서정연하고 참여의 문턱도 낮으며 폭력보다 설득이 앞선다. 하지만 그 외국인들은 이런 성숙함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시민성의 기적이 아닌 긴 시간의 고련과 누군가의 희생으로 빚어진 결과라는 것을 잘 모른다.
나는 8-90년대에 성장하며 뉴스에서 과격한 시위 장면을 보기도 했고 부모님 손을 잡고 나간 번화가에서 대학생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전경들과 대치하고 있던 풍경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때의 거리는 ‘의견을 말하는 공간’이 아닌 ‘충돌이 임박한 공간’에 훨씬 더 가까웠다. 김주열, 박종철, 이한열 같은 열사들의 이름은 너무나도 빛나는 동시에 한국의 시위 문화가 ‘성숙함’을 얻기 위해 어떤 폭력의 시대를 통과했는지를 상기시키는 얼룩진 발자국과도 같다. 우린 그런 열사들의 희생 덕에 성숙해질 수 있었고 그래서 지금의 거리를 보며 더더욱 생각하게 된다.
성숙하고 안정된 시위 문화는 분명 좋은 것이다. 하지만 과연 좋기만 한 걸까? 우리가 이룩한 질서가 때로는 분노의 칼날을 무디게 만들지는 않을까? 그리고 ‘성숙함’이라는 이름이 우리의 정치적 감각을 안전하게 길들이는 장치가 되지는 않을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성숙함’이란 단순히 폭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분노로 길을 잃지 않게 하는 장치들이 생겼다는 뜻이다. 피를 토하듯이 외쳤던 구호는 세대를 아우르는 노래가 되었으며, 군중은 서로를 다치지 않게 배려하며, 현장은 면밀히 기록되고, 외부인들은 그 기록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판단한다. 예전의 거리 시위가 힘과 힘의 충돌이었다면, 지금의 거리 시위는 문화 축제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이 되었다. 그 변화는 분명 소중한 성취다. 다만 그 성취가 언제나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성숙함이 어느 순간부터 ‘올바른 방식’이라는 틀로 굳어질 때 나타난다. 평화로움이 정당성의 조건이 되면 시위는 내용이 아닌 시위대의 태도로 평가받게 된다. 무엇을 말했는지가 아닌, 얼마나 질서 있었는지가 앞에 놓이게 된다는 말이다. 그 순간 시위는 시민성 테스트가 된다. 그리고 그 틀에 맞지 않는 것들은 밖으로 밀려나거나 스스로를 검열하게 된다.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떠올려 보면, ‘성숙한 시위’라는 말이 어디까지를 포용하는지 바로 드러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시위를 불편해하고, 일부는 과격하다고 느끼며, “왜 하필 시민들의 출근길을 막느냐”고 묻는다. 그 반응은 지극히 현실적인 동시에 또 다른 사실을 드러낸다. 어떤 이들의 목소리는 ‘질서정연한 거리’라는 틀 안에서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그들은 그런 틀 바깥에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것. 즉, 옳다/그르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성숙함’이라고 부르는 틀이 누군가에게는 처음부터 불리하게 작동하는 구조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성숙함이란 불편함이 배제된 상태가 아닌, 불편함을 감당하면서도 설득의 여지를 열어두는 능력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성숙함은 미덕이 아닌 조용한 배제의 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촛불의 파도는 한국 사회가 이룬 또 하나의 눈부신 성취지만 그 성취만이 영원하리라 믿는 순간부터는 새로운 약점이 될 것이다. 진정으로 성숙한 시위 문화란 질서라는 박제된 미학을 자랑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기꺼이 불편함도 감당하며 질서 바깥의 목소리도 외면하지 않으려 부단히 성찰해야 한다.
나는 한국의 성숙한 시위 문화에서 두 가지를 동시에 떠올린다. 하나는 물론 자랑스러움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부채감이다. 이 성숙함을 위해 대가를 치른 과거의 사람들, 그리고 이 성숙함을 유지하기 위해 침묵할 것을 강요받는 소수자들 때문이다.
촛불의 파도는 분명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이 누군가에게 눈부신 가림막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