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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5번째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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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iphany Jan 08. 2019

간장 국수와 심심한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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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인생의 첫 음식은 있다.


그것은 처음 먹은 음식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첫 음식도 아니다. 그저 첫 음식, 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속 깊은 곳에 이는 물결이 잔잔하게 가 닿는 어느 지점. 그곳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리고 감히 생각건대, 그 음식은 화려한 수식어나 강렬하게 뇌리를 스치는 맛,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고 어쩌면 그다지 복잡한 조리법조차 필요치 않을지 모른다. 인생의 첫맛이란 어찌 이다지도 심심한지. 그 맛은 또한 추억의 그것과도 비슷하다. 우리의 머릿속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기억이란 짜릿하고 신선하기보다 대개는 그저 아무것도 아닌, 당시에는 별 일 없이 지나쳐갔던 편안한 일상이다. 감각도 추억도 결국에는 나이 들어간다. 나이를 먹는 감각이란 보통 익숙함에 의존하기 마련이고 내가 의존하는 익숙함은, 그 어린 날 슴슴했던 간장비빔국수의 맛이다.

 


간장국수란 어찌 이다지도 담담한지. (출처: http://honghaha.tistory.com/75)



시작은 단지 어린 내 입맛에 빨갛고 자극적인 비빔국수가 맞지 않았을 뿐이었다. 혀를 때리는 강한 양념의 맛은 버거웠지만 국수는 먹고 싶었다. 그때, 우리 집 박 여사님이 휘뚜루마뚜루 무쳐 주시던 간장비빔국수.


간장비빔국수에는 오이를 올려 먹기도 하고, 반숙 계란이 올라가기도 하고, 계란 지단을 구워 함께 먹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집 간장 국수는 간장과 참기름을 쪼르륵 따라 손으로 휘적휘적 비비고 깨소금만 솔솔 뿌린, 그야말로 심심함의 극치였다.



 이 심심한 맛이 어린 나의 미각에는 어찌나 천재적으로 느껴지던지. 어릴 때는 심지어 우리 엄마가 나를 위해 만들어낸 요리라고 생각했고, '어떻게 엄마는 이런 생각을 해낸 거지'하며 먹을 때마다 감탄했다. 그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이 너무 좋아 국수 먹는 날만 기다리기도 하고 엄마가 오늘은 뭐가 먹고 싶냐고 물으면 한동안은 간장 국수만 외쳐댔다.



돌이켜보면 내 어린 날들도 그런 슴슴한 기억들로 가득하다. 부엌에서 나는 달그락대는 그릇 소리, 도마를 두드리는 기분 좋은 소리를 들으며 오늘 아침은 뭘까 설레며 일어났던 날들. 혼자 머리를 못 묶었었던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그 날의 고무줄을 신중하게 골라 엄마 앞에 앉아, 야무지게 머리카락을 모으는 당신의 손길이 아프다며 꽥꽥대던 기억. 30분 남짓 걸어서 다녔던 사시사철 다른 꽃이 피어 아름다운 등하굣길. 이런저런 사소한 순간들이 생각보다 깊고 진하게 어제의 일처럼 머릿속에 남아있다.



왜였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간단하기 그지없는 그 맛이 새삼 감탄스러웠던 간장비빔국수처럼, 사소한 일상들이 늘 놀랍고 신선한 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직 맛보지도 겪어보지도 못했던 내 순백의 감각 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던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신기하고 짜릿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간장 국수는 먹지 않게 되었다. 그 이별은 아주 느릿하고 덤덤했다. 더 이상 아이라고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을 때 문득 생각이 나서 먹어본 간장비빔국수의 맛은 이상할 정도로 평범했다. 밍밍하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에게 에디슨의 전구보다도 기발했던, 생각만으로도 군침이 돌던 그 맛은 이제 더 이상 거기에 없었다. 아니, 변한 것은 나였다. 무뎌지고 덤덤해지는 감각이 내가 더 이상 아이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넌지시 그러나 또박또박 말해주었다. 그 건 상처면서 동시에 성장이었다. 간장 국수가 나의 성장판이 되어주었다. 딱 성장판이 닫힐 그 나이쯤, 나의 간장 국수에 대한 애정 또한 막을 내렸다.



이제는 종종, 내가 간장 국수를 좋아했다는 것조차 잊고 산다. 하지만 누가 내게 어린 시절의 맛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대번에 떠오르는 건 역시 나의 간장 국수. 더 비싸고 맛있는 음식의 기억도 있을 텐데, 이상하리만치 내 마음속에 가장 길게 남아있는 것은 역시 간장의 짭조름함과 참기름의 고소함이 버무려진 그 평범한 맛이다.



잔잔한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나의 어린 날의 기억들도 마찬가지다. 그 일상의 기억이란 무던하기 짝이 없다. 평범하디 평범해서 역설적이게도 떠올릴 때마다 특별하게 뭉클하다. 그것들은 일부러 뒤적거리지 않는 한 더 이상 눈에 띄지는 않지만 거기 그대로, 고요하게 빛나고 있다. 언제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별 다른 아쉬움도 없이 그 시절처럼 무던하게.




그 덤덤한 간장비빔국수의 맛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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