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작품 설명
이민 온 첫해에 개기 일식을 보았는데, 그 진귀하고 신기한 경험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호들갑을 떨었더랬죠.
달 그림자가 해를 97프로쯤(?) 가리자 컴컴한 대낮이 되었어요.
그때 큰 아이였나, 작은 아이였나. 한국에 혼자 계신 외할머니도 같이 보았다면 좋았겠다고..
지나가는 말이었지만 참 스윗하지요.
물론 저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무뚝뚝한 딸인지라 엄마에게 그 말을 전하진 못했고요.
대신 저답게(?) 초단편 이야기를 써보았습니다.
맞아요. 이번 이야기는 팩션입니다.
(아, 주인공 경희는 제가 참 좋아하는 시인 한경 선생님의 성함을 빌려왔습니다.)
툭.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이 떨어지는 소리에 잠에서 깨니 저녁 뉴스는 이미 끝나있었다.
5시쯤 가벼운 저녁을 먹고 티브이 앞에서 그대로 잠들어 버렸나 보다.
십 년쯤 되었을까. 초저녁잠은 도무지 당해낼 재간이 없다.
소파 아래로 리모컨을 주우려 허리를 구부리는 데, 반나절은 걸리는듯하다.
어제 화초에 물을 주고 해를 골고루 쬐여줄 마음에 화분을 반바퀴 돌리다가 허리를 삐끗해서다.
사다 놓은 파스는 사용 기한이 3년이나 지난 것들 뿐이었지만, 그마저도 혼자서는 붙일 수가 없어 그냥 식탁 위에 펼쳐만 놓았다.
끙.
티브이를 끄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본다.
딸아이는 늘어놓는 식구도 없이 혼자 사는 노인네가 무슨 청소를 아침저녁으로 하냐고 성화지만, 하루 걸레질을 못했을 뿐인데 머리카락이며 먼지가 보통 신경에 거슬리는 게 아니다.
눈은 침침하고 시야는 안개 낀 듯 뿌연 대도 지저분한 것들은 어쩜 그리 잘 보이는 걸까.
딸깍
거실 등까지 끄고 나니 이제야 밤하늘이 잘 보인다.
지난주 내내 말썽이던 황사도 잦아들고 오늘은 공기도 하늘도 맑다.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밤공기를 마시고 싶어 숨을 크게 들이쉬자 허리에 통증이 밀려온다.
그래도 머리 위로 정확히 자리 잡은 저 달을 보고 있자니 고통도 시름도 잊히는 것 같다.
“아이구, 고운 달님. 오늘따라 더 어여뿐 달님~ 꼭 우리 경희 7살 때 빵실빵실한 얼굴 같네 그래.”
경희는 유독 밤을 좋아했다.
그땐 식당 일을 마치고 빨리 집에 와도 해가 지고 나서였다.
내가 퇴근한 깜깜한 저녁이 되어서야 딸의 하루는 비로소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경희는 아빠가 있었어도 일찍 철이 들었을 거라고 했지만 그건 알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경희가 또래보다 어른스러워 안쓰러운 점도 있었지만, 나는 대화가 잘 통하는 딸이 있어 고맙고 편한 마음이 더 컸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나면 치우는 것도 미룬 채 마루에 앉아 저녁 내내 달을 보았다.
경희는 매일같이 모습을 바꾸는 달이 신기하고 재미있어 죽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엄마, 그 얘기 또 해줘. 달 이야기.’라며 똑같은 이야기를 지치지도 않고 듣곤 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옥토끼나 해님달님 같은 것들이었는데..
그러다 경희가 국민학교 4학년 땐가.
출근길 버스 라디오에서 아폴로호가 달에 착륙한 날이 경희의 생일과 같은 7월 20일이라는 걸 듣고 경희에게 전해주었을 때, 순식간에 아이의 얼굴에 번지던 희열의 찬 모습을 기억한다.
그때부터였다. 경희는 달에 관해선 박사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교과서에서 배운 달은 이러쿵, 과학 책에서 읽은 달은 저러쿵 하며 나에게 달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달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해 햇빛을 받아 반사되는 것이고, 그래서 더 은은한 빛을 내는 거라고 했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아르테미스라는 달의 여신도 경희가 알려준 것이다.
아이 덕분에 아니 달님 덕분에 우리의 저녁은 날마다 풍성하고 활기찼다.
조금 더 커서는 달과 관련된 음악들도 들려주었다.
많은 노래들 중에서도 우리 모녀는 드뷔시의 달빛과 베토벤의 월광을 좋아했다.
어느 해의 어떤 계절이었던가.
포근 한 달빛을 쬐며 경희와 나란히 평상에 누워 달을 올려다보았다.
그 아이와 콩알만 한 이어폰을 하나씩 나누어 끼고.
“엄마, 달이 영어로 뭔 줄 알아?”
“문 아냐?”
“맞아, 근데 하나 더 있대. 루나. 지금 나오는 노래가 드뷔시의 clair de lune이라고 한 대. 음력도 영어로 lunar year(루나 이어)라고 하고.”
“루나.. 정말 예쁜 이름이네.”
그럴 때면 생각했다. 우주의 행운이 내 옆에 누워있노라고. 누군가는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모녀가 애달픈 처지라며 혀를 찼다. 팍팍하고 고단한 삶을 부정하진 못할 테지만 밤 하늘 달빛 아래 경희와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했다.
달님은 사랑이고 경희는 나의 우주고 우리는 서로에게 행운이었다.
‘카톡’
딸에게 메시지가 왔다. 동영상이다.
시계를 보니 경희가 있는 미국 시간은 아침 10시다. 돋보기를 찾는 손이 다급해진다.
꾹.
재생 버튼을 누르니 손녀의 모습이다.
“할머니, 저 루나에요. 할머니가 보내주신 이클립스 글래시즈 (일식 안경) 잘 받았어요. 땡큐 할므니. 아이 러뷰”
서툰 한국말도 사랑스럽기만 하다.
루나에게 다음 달에 있을 개기 일식 때 쓰라고 보낸 작은 안경이 도착한 것이다.
경희는 미국에서 1불이면 사는 안경을 뭐 하러 힘들게 보냈냐면서도, 루나가 좋아한다고 고맙다고 했다.
나는 손녀딸의 동영상을 세 번쯤 반복해서 보았다.
그리곤 답장을 썼다.
‘힘들긴. 할미가 그 정도는 해줘야지. 오늘은 달이 경희 널 꼭 닮았어. 좋은 하루 보내라.’
눈이 침침해 쓰다 지우고를 반복했다.
오타가 나지 않았는지 띄어쓰기는 잘 되었는지 한 번 더 확인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콜록
아직은 밤바람이 쌀쌀해 창문을 닫으려는데 순간 어지럼에 그만 비틀거리고 말았다. 방충망과 난간이 있지만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휴.
"달님. 나 이제 달님 옆 빈자리로 갈 때가 다 되었나 봐요.”
우리 모녀가 함께 달을 볼 수 있는 날이 몇 번이나 남았을까.
나는 다시 소파로 돌아가 티브이를 켠다.
-끝-
집안의 적막한 분위기를 표현하려 쓴 의성어와 효과음들이 글을 읽는데 방해가 되진 않으셨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