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오늘 처음 만난 미성년자와 이래도 되는 걸까.
“담배 한 갑만 사다 주실래요?”
잘 쳐도 중학교 2,3학년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길을 막아섰다.
네이비색 후디에 밝은 청바지를 입고 초록색 앙증맞은 스니커즈를 신은 아이였다.
담배를 필만큼 노는 애 같진 않았다.
우리 때 담배는 날라리들이나 피는 것이었고,
그들은 백 미터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요란하거나 껄렁껄렁한 차림새였는데 요샌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나는 나름 대학에서 교육학을 복수전공하고 교생 실습도 나갔었는데, 이 학생에게 담배를 사다 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있으시면 그냥 한 대만 빌려주셔도 돼요.”
“직접 사지 왜?”
아직 여드름도 나기 전인지 얼굴에 모공조차 보이지 않는 그 아이는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피식하고 웃었다.
“저한테는 담배를 안 파니까요.”
“나는 너한테 사다 줄 것 같니?”
“그러면 제가 언니 한 갑 사드릴게요. 저 한 대만 주시고 나머진 가지세요."
까맣고 동그란 안경테를 정직하게 코에 얹은 모습이나 머리를 곱게 빗어 넘겨 하나로 묶은 건 누가 봐도 범생인데 묘하게 호기심이 가는 아이였다.
아이는 내가 망설이는 걸 눈치챘는지 틈을 놓치지 않고 두 번 접힌 5000원을 불쑥 내밀었다.
뻔뻔한 건 요즘 젠지의 특징인지 그냥 이 아이가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여느 때 나라면 어림도 없는 소리라고 이름과 소속 학교를 물으며 일장 훈계를 늘어놓았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늘 아침 김 부장은 내 손톱을 보고 야하다고 했다.
"나 때는 화류계 여성들이나 빨간 매니큐어를 칠했는데 세상 참 많이 바뀌었어."
라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아니 하지 말아야 될 말을 덧붙였다.
이마가 작년보다 더 넓어진 그는 여자들이 머리를 기르거나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는 것도, 모두 남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 아니냐며 그런 여자들의 노력에 지나치지 않고 꼭 코멘트를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정말이지 자의식이 과하다 못해 치사량을 넘겨 진심 죽여버리고 싶은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짓거리는 그 인간 때문에 오늘도 기분이 잡친 것이다.
그런데도 잘난 남친은 언젠가부터 부장 뒷담화가 귀찮은 건지 그쪽도 남자라고 편드는 건지, 그러게 왜 눈 밖에 날 행동을 하냐며 얌전히 회사 생활이나 하라는 식이었다.
오히려 잘못이 내게 있는 것처럼.
혼맥이나 하면서 뒤집어진 속을 달랠 생각에 집에 맥주가 몇 캔이나 남아있었나 그런 생각을 하며 퇴근하는 중이었다. 그것도 내 기분을 나아지게 하지는 못할 테지만.
나는 아이가 내민 돈을 무시하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유리문을 밀자 문에 매달린 종이 흔들렸다. 핸드폰으로 무언가 열중해 보던 아르바이트생이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는지 아직 소년의 선이 남아있는 남자의 뒤로 담배들이 종류별로 가지런히 꼽혀있었다.
이런.. 일단 들어오긴 했는데 무슨 담배를 사야 할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다시 나가서 아이에게 무슨 담배로 사다 주면 되냐고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르바이트생에게 요즘 중학생들에게 제일 인기 있는 담배가 무엇이냐 물을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편의점 문에서 계산대까지 불과 몇 걸음을 걸어가다가 작년에 본 영화에서 김고은이 피던 담배 이름이 기적적으로 떠올랐다.
"말보로 주세요. 레드로. 아, 한 갑이요."
뭐.. 좀 자연스럽지 않으면 어떤가. 수치스러울 것도 떳떳하지 못할 것도 없지 않나.
합법적으로 흡연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십 년 전에 지났는데.
부자연스러운 건 저쪽도 마찬가지였다.
어리바리한 아르바이트생은 자신도 비흡연자인 건지 아니면 일이 아직 손에 익지 않은 건지 선반의 담배들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말보로 레드.. 말보로 레드... 말보..로..”
편의점 밖에서는 아이가 내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아! 여깄다."
생에 첫 담배 구입이라니. 정체된 대기에 불어온 신선한 바람 같단 기분에 상쾌하려는 찰나.
"4500원입니다."
상쾌는 개뿔.
애 엄마가 된 친구도 있으면서 신분증 검사를 하지 않는 아르바이트생 아니 편돌이에게 애써 빙긋 웃어 보였다.
"지난번에 맥주 살 때는 신분증 검사하셨는데."
"아, 아주머니는 괜찮으세요."
아니. 안 괜찮거든? 나를 포함해 한국인들은 왜 이렇게 호칭에 민감한걸까.
서운한 마음에 입을 삐죽 내밀고, 핸드폰을 열어 결제를 하려른데 카운터 위에 라이터들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아이가 내민 돈은 분명 5000원이었다.
만약 그 돈을 받아 담배를 샀다면 남은 500원은 돌려주었어야 했을까?
'거스름돈은 수고비에요. 언니 가지세요!' 라고 했으려나. 그러고도 남을 맹랑한 아이 같았다.
"잠시만요. 아저씨.”
그 소리에 퍽 놀랐는지 아르바이트생이 토끼 눈이 되어 나를 바라보았다.
훗. 어떠냐 너도 당해보니 기분 나쁘지?
“이것도 같이 할게요.”
“네.. 라이터같이 하시면 5000원입니다.”
이럼 딱 떨어지는군. 이로써 우리 둘은 자랑스런 대한민국인임을 증명하며 결제를 마쳤고, 나는 남자에게 참교육을 시전했다는 통쾌함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니 담부턴 학생이든 아줌마든 함부로 판단해서 정의하지 말란 말이다.
밖으로 나오자, 길 건너 분식집에서 사장님이 양손에 나무 주걱을 쥐고 분주히 떡볶이를 뒤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대로 멈추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넓은 사각 철판 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매콤 달콤한 떡볶이 냄새와 바삭하게 튀겨낸 각종 튀김의 향을 실어 나르며 그 주변 전체를 매혹시키고 있었다.
꾸르륵..
그때 빗방울 하나가 얼굴에 떨어졌다.
다시 들어가 우산도 하나 사 와야 하나 생각이 들 때 아이가 다가왔다.
나는 편의점 옆 골목을 턱으로 가리키며 고갯짓을 했다.
아이는 치사하게 혼자만 비를 피하겠다고 입고 있던 후드티의 모자를 뒤집어썼다.
그리곤 양손을 후디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졸래 졸래 쫓아왔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어릴 때 키우던 몽구가 생각났다.
사고뭉치에 나를 별로 따르지 않아 얄미운 구석이 있었지만 귀여운 외모 때문에 한 번도 제대로 미워하지 못한 녀석.
트렌치코트 주머니에 넣은 담배와 라이터의 감촉을 느끼며 골목을 걸어 들어갔다.
나는 지금 죄를 짓고 있는 걸까...?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