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타성을 깨는 여행.
어쨌거나 여행은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도피적인 성질을 띤다. 그렇게 도망쳐 온 파라다이스에서는 특별한 것을 봐야 한다는 강박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특별함을 기대하는 걸까. 그래서 여행은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의 문제라는 결론이 나온다.
나는 세상을 외롭게 만드는 걸 좋아한다. 사람들이 보기에 나는 혼자 일지 몰라도, 세상을 벗어나 나만의 행성에서의 휴식을 즐긴다. 그러면 내가 세상을 따돌리는 느낌이 든다. 외딴 위성이 되어 세상을 관찰하고, 일상적인 공간이 가지는 평범함과 지루함을 붕괴시킨다. 직장인과 관광객이 혼재하는 이 빌딩 숲에서 머무는 것은 내 오랜 꿈이었으며 내겐 가장 이상적인 여행 중 하나다.
유행인지 모르겠지만, 자연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요즘은 생각이나 의식도 자아의 발달이 아닌 유행의 결과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도심처럼 외로움과 활기가 공존하는 곳도 없다. 그래서 나는 도심을 좋아하며, 어렸을 때는 집 없이 평생 도심의 호텔방을 전전하는 신세를 꿈꾸기도 했다. 꽤나 낭만적이지 않은가?(아니!)
체크인을 하고 방을 안내받아 올라간다. 네모난 창 밖으로 파도 모양을 본뜬 서울시청과 빌딩 숲이 펼쳐진다. 정확히 내가 원한 연말의 풍경이다.
서울시청 스케이트장에서 사람들이 무리 지어 둥글게 돌고, 차들은 빌딩 숲으로 사라진다. 사람들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도는 모습은 마치 회전 관람차 같아서 넋 놓고 보게 만든다. 호텔 방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신이라도 된 듯, 경직된 마음이 풀리고 너그러워진다.
#1 명동돈가스
서울시청 근처의 호텔이 가지는 접근성은 정말 마음에 든다. 과연 서울의 한가운데답게, 걸어서 명동, 을지로, 종각 등을 갈 수 있다. 오늘은 명동을 향해 걸었다. 성탄절이 막 지났을 뿐인데 거리는 한산하다. 습관처럼 찾는 명돈돈가스에 들러 식사를 한다. 관광객을 홀리는 호객꾼들과 화려한 조명 가득한 명동에서 명동돈가스는 하나의 성역과도 같다. 이유는 들어가 보면 안다. 들어서면 조리과정을 지켜보며 식사할 수 있는 바 테이블이 펼쳐진다. 중년의 종업원이 나긋한 목소리로 자리를 안내해준다. 잘 다림질된 유니폼을 입고, 반찬을 내어주는 손짓 하나 요란한 법 없는 이곳.
일단 자리에 앉아 주문을 마친 후 돈가스가 튀겨지는 걸 보노라면 지난 일들은 솜처럼 가벼워지고 얼었던 몸은 긴장을 푼다. 35년 역사가 증명하는 바삭하고 도톰한 로스가스를 겨자 섞은 소스에 찍어 입에 넣으면 그게 바로 '평화'라는 단어의 맛인 것만 같다.
식사를 마친 후 명동에 더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촌스런 복장으로 당시 가장 힙했던 명동 에이랜드에 발을 들였던 게 벌써 10년 전이다. 명동이라면 알만큼 안다. 방향을 틀어 시청광장으로 돌아간다.
#2 커피앤시거렛
커피 한 잔 가격으로 서울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누구도 마다하지 않을 거다. 시청역에 바로 그런 곳이 있다. 시청 역을 지나 덕수궁 돌담길을 둘러 '언제까지 걷지?'라는 생각이 들 때 커피앤시거렛이 나온다. 1층에 계신 수위님이 눈썰미로 알아보시곤 '커피앤시거렛은 17층에 있습니다'라고 알려주신다.
해가 빨리지는 겨울, 커피앤시거렛의 야경은 그만큼 일찍 찾아온다. 노트북을 가져왔다면 구석 자리에 앉아 사람들과 풍경을 눈동냥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았다. 와플과 커피를 시켜 자리에 앉았다. 연말이라 그런지 공간은 사람으로 가득하다. 아쉽게도 큰 창가 쪽 자리는 두 개 밖에 없는 것 같다. 그곳의 자리는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다 마시고 바로 자리를 뜬다.
#3 호텔에서의 독서
호텔로 돌아와서 책을 읽었다. 에리히프롬에서 장 보드리야르 그리고 요즘은 슬라보예 지젝에 푹 빠졌다. 바깥은 이미 어둑하다. 스케이트장의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었다. 퇴근시간에 가까웠고, 평소였으면 어떻게든 제시간에 일을 마쳐보려고 허둥대고 있을 터였다. 똑같은 나, 똑같은 목요일인데 나는 다른 하루를 보내고 있다니.
#4 퇴근 시간의 시청 일대
대충 책을 읽고 퇴근시간대에 맞춰 밖으로 나왔다. 커다란 빌딩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 게 보인다. 터덜터덜 귀가하는 이들의 모습을 관찰하며 나는 진정으로 여행자가 된 기분을 느낀다. 누군가에게 지긋지긋한 삶의 현장이 여행자에게는 새로움 가득한 집이 된다.
#5 모두가 떠난 서울
한 밤의 서울엔 누가 남아있을까. 시간이 되면 떠나야 하는 신데렐라처럼 늘 막차시간에 쫓겨 떠나는 신세였지만 오늘은 느긋이 관찰할 수 있었다. 시청 바로 옆의 빌딩 숲 뒤켠의 포장마차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한산한 거리의 포장마차는 섬 같았다. 호텔방에 들어와 자기 전 바깥을 보니 스케이트 타던 사람들로 북적였던 스케이트장은 텅 비었고 건너편 빌딩은 야근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불 켜져 있었다. 차도 잘 안 다닌다. 거리엔 사람도 없고, 아까 보고 온 포장마차만 지상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 종말이 왔고, 나 혼자 남겨진 기분. 도심의 낮은 직장인이, 밤은 여행자의 차지다.
#6 진짜는 다음날 아침
일 년에 몇 없는 서울 한복판에서의 하룻밤이기에 쉬이 잠들고 싶지 않았지만, 허겁지겁 체크아웃 시간에 떠밀려 나가는 게 싫어 비교적 일찍 잠들었다. 암막 커튼을 쳐보니 햇살이 온 땅에 내려앉고 있었다.
맞은편으로 보이는 성공회 주교좌성당의 주황빛 기와가 눈에 들어온다. 차들은 다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천연색의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이 여행의 목적이 오로지 이 풍경에만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아침의 여유를 만끽하고 내려와 체크아웃한다. 언제쯤 다시 도심에 올 수 있을까.
2018년, 이탈리아 거리 위에서 겪었던 경이감을 토대로 2019년 브런치에서 [걸어서 동네속으로]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포토샵도 잘 못하는 처지에 내가 할 것이라곤 생각을 최대한 잘 쓰는 일이었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픈하우스 서울 프로그램으로 성공회주교좌성당을 다녀와 글을 쓴 것이 성당의 계정을 통해 게시가 되기도 했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줬다. 보잘것없는 사람의 경험을 한 명 이상의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글은 존재 이유를 다 한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여행을 '경이감'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없다면 여행을 다녀와도 그저 새로운 경험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탈리아 거리를 반복해서 걸으며 점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때, 나는 떠나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 광화문에서 그 날의 기분과 날씨에 따라 정처 없이 걷는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점에서 도심에서의 하룻밤은 그저 거리를 걷고 끝나던 평소의 여행의 연장선이며, 어쩌면 보다 여행다운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일상적이지 않은 풍경도 좋아하지만, 타성으로 굳어진 일상의 풍경을 깨는 것도 매우 좋아한다. 여전히 같은 거리에서 새로운 걸 본다. 2020년에도 이 보잘것없는 일상이 매우 많이 깨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