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있는 부산사람들
"여행에서 남는 건 먹을 것이다."는 말에 적잖이 공감하지만, 덧붙여 물건과 사람 또한 남는다고 하련다. 호텔에 비치된 어매니티나 빨래 봉투 같은 것들은 호텔에 대한 기억을, 우연찮게 만난 멋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서 있는 동네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여행지는 이(것)들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복작한 관광지에 다름 아니던 부산에 대한 내 오해를 꼭 풀어주고 싶다는 여자 친구의 강권으로 가게 된 부산은 이렇게 멋있는 도시가 됐다.
2박 3일의 탐험으로 미루어보건대 부산은 맛과 멋의 도시다.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며 살아남은 맛집과 이들에 비하면 젊다고 할 수 있지만 뚜렷한 비전과 취향으로 똘똘 뭉친 '멋집'들. 이들에겐 하나 공통된 것이 있다. 깊이. 특색 있는 찬과 밥에 슥 비벼먹기 좋은 돌고래 순두부, 아마 부산에서 가장 '힙'할 발란사, 사장님의 매니악한 식물사랑이 느껴지는 보노비스타 & 보타, 마지막으로 전통주와 업계를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이 느껴지던 이유있는 술집까지. 공간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도 모르게 시간이 훌훌 넘어가버렸고, 그들의 깊이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돌고래 순두부는 1980년 개업했다. 화려하진 않아도 오랜 시간 동안 뚝뚝하게 지켜온 내공을 말해주듯, 가게는 사람들로 복작 인다. 구제 샵이 몰려있는 시장 한쪽에 자리해 상인들을 위한 평범한 밥집으로 여긴다면 큰 오산. 가장 유명한 메뉴는 순두부 백반. 단돈 5천 원에 자작한 순두부찌개와 공깃밥, 김치와 어묵무침이 나온다. 이 집 김치는 따로 포장해가는 사람도 있을 정도라고. 김치와 함께 내어주는 어묵무침도 일품이다. 다데기처럼 꾸덕한 양념이 꼬들한 어묵에 버무려져 짭짤한 맛을 낸다. 찌개는 작은 뚝배기에 나오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조림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매콤하고 간간한 맛이 훅 들어온다. 다진 고기가 들어간 양념장의 진한 맛이 어우러져 밥도둑이 따로 없다.
* 학부시절에도, 그 이후에도 순두부찌개는 곧잘 먹어왔지만 돌고래 순두부의 찌개는 유니크하다. 이 '비벼먹는' 순두부를 몰랐다면 나에게 순두부찌개는 앞으로도 비슷했을 것이다. 찌개만큼이나 특별했던 건 어묵. 쫄깃한 식감에 톡톡 치는 고춧가루 맛이 좋다.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가게답게 뭔가 낡은 느낌이지만 허름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돌고래 순두부, 네이밍부터 일단 합격이었다.
발란사는 2008년에 시작됐다. 처음 시작할 때 이름을 '반란사'로 정했는데, '반란'이라는 뜻에 포커스를 맞췄다고. 당시에는 의류를 셀렉해 판매하는 느낌이었지만 지금은 자체 제작/셀렉한 의류에서 빈티지한 물건들, 음반들까지 다양한 물건을 취급한다.
* 공간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고, 발란사가 그랬다. 브루클린 느낌 물씬 나는 붉은 벽돌 건물에 자리 잡은 샵은 외관부터 힙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사장님이 멀뚱히 앉아계셨고 물건들은 샵 바닥에 진열돼 있었다. 거기서 내가 느낀 건 불쾌함보다는 어떤 충격이었는데, 그건 일종의 자유분방이랄까. 태엽으로 돌아가는 햄버거 장난감을 보고 있으니 '잘 작동하는 걸 골라가라'며 직접 태엽을 돌려주시던 사장님. 디자이너인 여자 친구와 짧은 대화를 시작으로 준비 중인 2층 공간까지 보여주셨다. '여기 있는 건 모두 파는 거다'라는 그의 영업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대접을 받아보기도 처음이었다. 발란사는 그 자체로 사장님의 모든 것이 녹아든 공간 같았다. 그가 틈틈이 모아왔던, 판매되는 빈티지 오브제들과 음반들은 그의 역사와도 다름없으니까. 거기에 가게 한켠에 걸린 딸 사진으로 딸에 대한 사랑도 묻어났다. 사람이 가게가 되면 이런 느낌일까.
보노비스타 & 보타는 빈티지 의류와 식물을 취급한다. 원래는 식물만 취급했으나 빈티지 의류를 더했다. 요란한 입간판 하나 없이 2층에 자리한 이곳은 들어서는 순간 재밌다는 인상을 준다. 식물들은 판매하기도 하지만 인테리어 포인트가 되는데, 특히 화분 역할을 하는 조던이 인상적이다.
* 사람들은 빈티지 샵으로 많이 찾고 있는 듯 하지만 내 관심은 식물이었다. 한 때 괴근 식물을 비롯한 특이식물에 빠져 몇 년 전부터 인스타 계정을 염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곳은 부산에 오면 꼭 들러야 할 곳이었다. 한창 공간을 둘러보고 있을 때, 사장님이 기르는 식물이 있냐고 물어왔다. 구갑룡(식물이름)을 기른다고 하자, 가게에 있는 50년 된 구갑룡을 보여주셨다. 식물의 이름이나 기르는 법, 자신의 실패담 등을 말해주는 사장님에게서 진정한 매니아의 모습을 봤다. 식물에 대한 나의 얄팍한 지식으로는 그저 그의 깊이를 헤아릴 뿐이었지만, 식물을 좋아하고 기른다는 이유로 입이 마르도록 이야기를 해주셨다. 구매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그 따뜻함과 깊이를 느낄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이유있는 술집은 전통주를 취급한다. 구성을 보면 갈 때마다 구비하고 있는 술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고깃집에 딸린 이 작은 보틀 샵은 크게 막걸리, 증류주, 약주로 나뉘는데 그 구성이 알차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양주에서 부산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전통 있는 막걸리까지. 최근 서울 잠실에도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 오픈 시간도 적혀있지 않아 전화로 물어물어 찾아간 이곳. 맛있는 막걸리를 찾는다는 나의 말을 듣고 드라이한 막걸리, 산미 있는 막걸리 등 종류별로 추천을 해주셨다. 최근 관심을 가진 '만남의 장소' 막걸리도 보였는데, 사장님이 마시려고 남겨뒀는데 판매도 하신다고. 시음으로 맛본 막걸리는 웃음을 자아냈다. 걸쭉한 미소를 지으며 사장님의 설명을 들었는데, 양조장까지 직접 찾아다니시는 그녀의 열정이 돋보였다. 가지고 있는 술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어 보이는 그녀의 지식도 놀라웠지만 술을 대하는 그 태도에 내 세계관도 넓어진 듯하다.
이 짧은 만남과 대화 속에서 내 세계는 조금 더 넓어졌다. 금전적인 이유로 오랜 시간 쇼핑을 멀리했던 나도 생각을 고쳐먹게 만들 정도로 부산 사람들은 멋있었다. 특히 보노비스타 & 보타 사장님이 그랬다. 식물에 대한 열정과 해박한 지식으로 무장한 그의 깊이감이 바깥으로 드러나듯, 올백 머리와 앤틱한 안경으로 포인트를 준 그의 모습은 쿨했다.
화려한 겉모습도 좋긴 하지만, 사실 나는 사람들의 태도에 더 끌린다. 그리고 이 태도는 대화를 해 보거나 그들이 해놓은 것을 보면 단박에 알아챌 수 있다. 깊이는 감추기 힘든가보다. 어느순간에는 그들의 '멋'이 바깥으로도 느껴질 때가 있다. '막걸리는 김치 같다'며 양조장의 사연을 꿰고 계셨던 이유있는 술집 사장님의 큐레이션이 그러했고, 우리가 대화를 나눴던 모든 곳이 그랬다. 자기만의 멋과 뜨거움을 가진 사람들 이었다. 자기다움과 뜨거움, 이것들이 어우러져 '멋'을 풍기는 게 아닐까.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지만, 멋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나니 마음 한 켠이 따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