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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piphany Nov 03. 2019

나만의 종교

더 풍요로운 현재를 위하여

1단계: 신은 존재한다.


    어렸을 적 나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엄마를 따라 매주 교회에 다녔다. 꼭 믿음이 대단해서 만은 아니었고, 교회에서 형성되어 있는 커뮤니티에서 또래 친구 들과 활동하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 같다. 성가대, 달란트 시장, 부활절 달걀 나눠 주기 행사 등 한국 학교에서는 별로 없었던 다양한 이벤트에 참여하는 것도 좋았다. 그러다가 가끔 교회에서 틀어주는 (해외 파 재연 배우들이 연기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영상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나도 모르게 격한 감정을 경험하기도 했고, 소리 내어 기도를 하라는 주일 선생님의 지시를 따르다가 더 이상 어떤 내용을 더 말해야 할지 몰라 실눈을 뜨고 주변 친구들을 살피기도 했다.


     초등학생 치고는 꽤 바람직한 기독교 신자로 성장하는 중이었고, 그런 모습을 스스로도 어느 정도 뿌듯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점차 나의 가치관은 기독교가 지배하게 되었고, 선악의 구분 기준도 그러했다. 이는 꽤 간단한데 기독교와 가까우면 좋은 것, 그렇지 않으면 나쁜 것이었다. 예를 들면 천주교는 그리 나쁘지 않은 편에 속했고, 불교는 나쁜 쪽에 속했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의 저 반대편에 있는 유교 문화에 따라 제사를 지내는 친가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조상들이 좋아했던 음식과 향으로 그들의 혼을 불러내는 제사 행위는 교회에서 금기시하는 바로 우상숭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가끔 (어디서 들은 바대로)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몰래 제사상 위에 올려진 갖가지 음식에 검지 손가락으로 십자가 모양을 그려 넣고는 했다. 반면 외가는 친가와는 달리 매우 선진적인 곳이었다. 미국에서 개척교회를 하시는 외삼촌이 계시는 외가 모임에 가면 우리는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었고, 대신 마치 미국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남녀 구분 없이 둥그런 원을 만들어 앉아 성경 구절을 읽고 찬송을 불렀다. 어린 내게 이는 매우 세련되고 선진적이었다. 나에게 기독교는 절대적인 선이자 진보적인 종교였다. 


2단계: 신은 존재하지 않는 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었다. 이때도 가끔 교회에 다니기는 했지만 예전만큼 열심히는 아니었다. (교회를 다니는 남자 친구를 만나 짧은 기간 동안 열심히 다니기도 했지만) 그러다 리처드 도킨슨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을 읽고 문화적 유전자로 설명하는 ‘선’에 대한 정의와 근거들을 접하고 생각의 전환을 맞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의 다른 책들과 함께 우주 탄생 및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책과 다큐멘터리들을 찾아보면서 조금 더 큰 사고의 전환을 경험하게 되었다. 간단히 간추려 보면,


인간 또한 신이라는 조물주의 창조물이 아닌 모든 동물이 겪는 ‘진화’라는 과정을 통해 탄생하였으며,

현대 과학의 발전을 통해 이 세상의 많은 부분들이 신의 영역이 아닌 과학의 영역으로 설명될 수 있으며, 내가 믿어야 하는 범위는 나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까지 이지 그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

기독교인 부모를 만나 기독교인이 되었을 뿐, 만약 다른 지역에서 태어났다면 힌두교도로, 무슬림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 절대적인 종교는 없다는 것.  


    그래서 나는 잠시 무신론자가 되었다. 신은 없다고 믿었다. 우주는 과학적 법칙으로 작동되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언젠간 과학의 발전으로 밝혀질 것이지 '신'이라는 미명 하에 퉁 쳐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신론자가 된 이후 나는 그동안 교회에서 받아온 세뇌들을 끊기 위해 노력했다. 무엇보다 교회에 나가지 않거나 마음속으로 기독교를 의심하는 생각을 하면 언젠가 벌을 받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불안을 끊어내고자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이렇게 나는 독실한 크리스천에서 '무신론자'가 되었다.


3단계: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반면 지금은 종교에 대해 보다 유연한 태도를 갖게 되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인류의 역사에 전쟁과 같은 많은 희생을 남기기도 했지만, 반면 종교 덕분에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켜주는 뛰어난 예술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종교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것은 종교에 의해 ‘파생’된 것들이지 종교를 받아들이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이 세상에 이상한 종교인이 많다고 해서 그 종교가 옳지 않은 것이 아니 듯, 종교로 인한 사회의 긍정적 가치가 크다고 해서 그 종교가 옳은 것도 아니다.)


    하여튼 지금 나의 생각은 종교는 지금의 삶을 더 충만하게 해 주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주로 내세를 해석하는 종교의 정의와는 많이 다를 수 있지만,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내세를 가정하는 것 자체가 현재를 위로받기 위해서가 아닌가? 만약 종교로 인해 현재를 불행하게 살아가야 한다면 그것은 좋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면 종교가 다른 부부 사이의 갈등을 들 수 있겠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와 그렇지 않은 남편과의 갈등은 누구를 위한 갈등인가? 사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관계가 아닐까? 나에게 이제 종교는 절대선이 아니고 다양한 문화적 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혹시 나의 소중한 사람이 내가 교회를 함께 가 주길 원한다면 나는 교회가 함께 갈 용의가 있다. 혹시 절에 다니기를 원한다면 나는 절에 함께 갈 용의도 있다. 성당도 마찬가지이다. 너무 줏대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신념은 명확하다. 종교에 속박받고 싶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 더 풍요로운 현재를 살고 싶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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