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충무로 국제 영화제에서 영화제 참가를 위해 한국으로 온 외국 영화감독의 통역을 도운 적이 있다. 당시 내가 담당했던 감독은 ‘안드레스’라는 칠레에서 온 독립 영화감독이었고, 공항 픽업에서부터 시사회 그리고 마지막 시상식까지의 일정을 함께 하며 필요할 때 통역을 도와주는 역할을 맡았다. 영화제가 끝나고는 작별인사를 하며 연락처로 페이스북 계정 정도를 주고받았지만 이후 1-2년 정도 가끔 안부를 묻다 자연스레 연락이 끊긴 것이 벌써 10년이 넘었다. 의도치 않게 페이스북에 가끔 들어갈 때마다 보이는 포스팅으로 대략적인 그의 근황 - 영화 제작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화가로서의 삶도 살고 있는 것 - 정도만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된 그가 그린 그림 한 점에 시선이 딱 멈추었는데, 그림 속에서 어린 시절 어렴풋했던 기억 한 장면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영어학원에서 기획한 영어 캠프로 미국 위스콘신에 다녀온 적이 있다. 한 2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을 데리고 1-2개월 정도 되는 기간 동안 미국에서의 일반인 가족(‘호스트 패밀리’)과 생활하고 현지 학교에서 수업도 수강해보게 하는 그런 뭐 그런 ‘유학 맛보기’ 코스였다. 내가 함께 지내게 되었던 호스트 패밀리는 한국인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고 있는 가족이었는데, 학교 선생님이었던 ‘호스트 맘’과 경찰관으로 재직 중에 있던 ‘호스트 대디’가 아이를 위해 한국의 문화를 배우고자 이 프로그램에 신청을 한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나에게 호의적이었고 함께 지내는 동안 가족처럼 나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학교 선생님이었던 호스트 맘 덕분에 나만 예외적으로 한국 영어 학원에서 연계해 준 학교가 아닌 호스트 맘이 재직 중인 조금 더 좋은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호스트 맘의 차를 타고 매일 함께 등하교를 했고, 이 때문에 나는 학생들보다는 조금 이른 선생님들의 출근 시간에 맞춰 등교를 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혹여나 나 때문에 호스트 맘의 출근 시간이 지체되서는 안 된다고, 그래서 늦잠을 절대 자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아주 엄격하게 생각했던 때가 기억이 난다. 이에 항상 새벽 6시에 알람을 맞춰두고 간단한 아침과 준비를 하고는 7시가 되기 전에 차에 몸을 실었는 데, 옷을 아무리 두껍게 입어도 밤새 기온이 뚝 떨어진 차에 들어가 앉으면 피부에 닿는 촉감이 너무 차가워 차 안에서의 움직임을 최소화하였다. 그러다 학교에 도착해 내릴 때면 따뜻하게 데워진 차에서 내리기 싫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당시 미국에서 다양하고 새로운 것들 많이 경험했지만 그중에도 등교를 준비하던 아침의 루틴이 뚜렷이 기억나는 것은 아마 끔찍하게 추웠던 그 해 겨울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루는 밤새 폭설이 왔는지 찻 길에 옆으로 눈이 어린 내 키만큼 쌓여있었던 날이 있었다. 쌓인 눈을 사이로 전방에 보이는 집에서도 출근 준비를 하는지 오렌지 빛의 불빛이 나오고 있었는데, 그 빛이 내가 있던 차 안의 추위와 대비되며 너무나 따뜻하고 안락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집이 세상에 가장 따뜻한 곳 같아 보이기까지 했다. 차로 거리를 조금 나왔을 때 보인 풍경도 인상 깊었는데 새벽의 어두움이 새하얀 눈에 반사되어 온 동네가 푸른빛으로 감돌아 꼭 이글루의 푸른빛 같았다. 마치 나폴리에서 봤던 푸른 동굴처럼.
내 기억 속에만 있던 이 장면은 누구에게도 입 밖으로 말한 적은 없었고, 사실 나 조차도 자주 떠올리던 기억은 아니었다. 얼마 전 페이스북에서 안드레스의 그림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새로운 기억들이 층층이 쌓여 저 밑에 있던 이 기억은 그림 덕분에 오랜만에 수면 위로 올라왔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10년만에) 그에게 연락을 했고 태어나 처음으로 작품이란 걸 구매해 보았다!
- 나의 첫 콜렉팅을 기념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