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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Apr 10. 2024

다미앙 전기를 읽다.

팜 브라운, 다미앙, 중앙교육연구원. 1991년.


다미앙 전기(팜 브라운 지음, 중앙교육연구원)를 읽다. 지금은 “우리 집”이 아닌 “우리집”이라고 씀으로써 고유명사를 존중하지만(아래아한글은 맞춤법에 어긋나니, 고치라고 빨간 밑줄을 그음을 하지만), 두 개의 낱말로 보아서 “라틴 말”, “한센 병”이라고 편집자가 쓸 만큼, 맞춤법이 지금과 다르구나 싶을 정도로 오래된 책을 읽으며 든 생각은 “이 분도 참 인간다운 인간이구나.”이다.      


하와이 몰로카이에 가다

가톨릭 사제인 다미앙 신부(father damien, 1840-1889)는 한센인들을 돌본 사회선교사이다. 벨기에의 루뱅에서 1840년에 태어난 그는 르 콩 고등학교 시절에, 가톨릭교회의 수녀와 사제인 누님들과 팜필 형님의 영향을 받아 그 자신도 성직자가 되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라틴어 공부가 부족함을 깨닫고는 형님에게 라틴어를 꾸준히 배웠고, 파리와 루뱅에서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여-같은 시대의 한국인 조선에 비유하면, 청소년이 퇴계 이황이나 다산 정약용 선생과 같은, 학문이 깊은 학자가 되기 위해 학문이 있는 훈장님께 논어, 맹자 등의 한문학을 배운 셈이다.-사제로 자라 갔으며, 장티푸스에 걸린 팜필 형님을 대신하여, 성심수도원 참사회의 결정으로써 선교사로 보냄을 받은 하와이 호놀룰루 대교구에서 마저 신학을 공부하여 가톨릭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1864년)

그는 열정이 많아서 원주민들의 언어를 배워서 선교사로서 활약을 하였으며, 지금은 감염 확률이 낮은 병이고 항생제로 고칠 수 있는 병임을 알지만, 그 시대에는 한센병은 고칠 수 없는 전염병이었고, 이민들에 의해 전염되었기 때문에 면역력이 없는 원주민들은 한센병에 걸리기 쉬웠다. 

그래서 하와이 정부에서는 예산을 들여 한센병의 감염을 막기 위한 보건활동을 했고, 그 시대에는 가장 합리적인 보건정책인 격리수용을 했는데, 몰로카이 섬에서 한센인들이 격리된 채로 일교차가 큰 하와이의 날씨 때문에 저체온증(한동대학교 교수님이 대경일보에서 쓰신 수필을 읽고 알았음.)에 걸리거나,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굶어 죽었다. 하와이 정부에서도 예산을 들여 식량지원을 하는 등 노력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는데, 다미앙 신부가 교구에서 선교사를 보낸다고 하자 자신이 가겠다고 말하였다. 그는 건설노동자로서 성 필로메나 성당을 짓고, 파이프를 연결하여 수돗물을 마시도록 했으며, 집을 지었고, 노동자로서 증상이 가벼운 한센인들과 같이 고구마 농사로써 노동을 했으며, 가톨릭 사제로서 한센인들의 절반 이상인 분들인 가톨릭 신자들과 미사를 드렸으며, 개신교, 가톨릭이 선교경쟁을 벌이는 다툼 속에서도 개신교 신자와 가톨릭 신자를 평등하게 돌보았고, 개신교를 믿는 은행장과 런던에서 목회하는 성공회 사제의 도움을 편견 없이 받아들였다. 

그의 따뜻한 삶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 연대하는 분들도 많았다.

미국에서 듀턴이라는 사람이 1886년에 와서 40년간 같이 일했는데-어제 구글로 검색하여 크롬의 번역기능을 써서 읽어보니, 미국 사람이고, 남북전쟁에 포병으로 참전했으며, 낭비벽이 심한 아내와의 결혼에 실패한 후에 가톨릭 사제가 되고자 했지만, 다미앙 신부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고는 주저 없이 연대를 했다. 그는 소년의 집과 같은 사회복지시설을 조직할 때마다 가톨릭의 도움을 받을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두 분 모두 성격이 밝아서 서로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일랜드에서 온 수도사인 제임스 수사와 목회는 처음인 콘라디 신부의 도움도 받았다.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 터라 매우 행복했고, 한센병에 걸렸을 때는 드디어 환우들과 같아졌다면서 기뻐하는, 매우 긍정적인,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이다.     


평범한 인간

하지만 그는 평범한 인간이기도 하였다. 한센인들의 질병을 두려워했고, 불편하게 여겼으며, 교구의 행정절차를 무시한 채로 기부금을 환우들을 위해 옷을 사는 일에 써서 교구장과 갈등을 겪었고, 그가 존경을 받으면 받을수록 시기와 질투를 하는 무리들이 있었고, 만년에는 극히 적은 확률로 한센병에 걸려 순직했는데, 한센병으로 몸이 병든 그를 교구에서는 박정하게 외면했다. 교구에서 선교사를 전염 위험이 크다면서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편지를 보내 교구에서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하자, 이기적이라고 교구장이 비난을 했으니 교구와 다미앙 신부의 갈등이 심했다. 요양조차도 수녀원에서 요양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지만, 정작 교구에서는 전염될 위험이 크고, 미사 집전을 할 수 없다면서 요양을 하도록 배려하지도 않았다. 이러한 갈등에는 전염병에 감염된 한센인들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편견과 혐오가 한몫했고, 교구의 행정절차보다는 당장의 실용성을 우선한 다미앙 신부에 대한 못마땅한 감정도 컸을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한다. 

실제 다미앙 신부는 몰로카이로 돌아올 때 상처를 마음속에 가득 받은 채로 왔으며, 세속에서는 1898년 미국의 51번째 주로 합병되기 이전의 하와이 정부에서 예산을 들여 사회복지시설인 한센인 공동체를 지원했고, 1885년 한센인들이 주최한 음악회에 여왕과 공주가 참여하였으며, 1934년에 벨기에 정부에서 이장을 할 정도로 존경을 받았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순직(1889년) 후에 100여 년이나 지나서 베네딕토 16세 때에서야 시성 했다.

성격도 못마땅하면 참아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행정가가 정년은퇴를 한 후에 행정업무를 했는데, 그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원만하게 소통을 하는 듀턴과 달리 공동체 안에서의 갈등이 심했으며, 선교사들이 두 분이나 다미앙 신부님과 같이 일하지 못하겠다면서 그만두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써 넘어선 사람, 매일 성무일과로써 전례에 따른 기도를 드리는 믿음으로써 성인으로 성숙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도 한센인들에 대한 편견을 불식시켜서 유퀴즈에 한센인들과 같이 사는 에스파냐 수사가 나올 정도로 가톨릭교회가 한센인 돌봄 노동에 진출하도록 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고, 개신교와 가톨릭이 하와이에서 선교활동을 둘러싼 갈등을 겪던 시절에 다미앙 신부는 개신교, 성공회의 도움을 받았고, 개신교를 믿는 한센인들을 편견 없이 대한 너그러움은 교회일치운동의 실천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4년 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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