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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Dec 31. 2023

박수근 화백-민중들을 그리다.

선을 넘는 녀석들.

MBC 선을 넘는 녀석들 컬렉션 박수근 화백 편을 봄.

박수근 화백은 강원도 양구군이 고향이며, 밀레 화백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양구초등학교에서 공부할 때에 교장과 교사가 다른 과목은 평범하지만, 미술 성적이 좋은 박수근 학생의 재능을 칭찬하셔서 부모님께 미술 공부를 권하였다고 한다.
평생의 반려자인 김복순 여사와 함께 부친의 광산사업 실패, 홍수로 인한 논밭 소실 때문에 겪은 빈곤, 가족이 흩어진 한국전쟁(박수근 화백이 한국군을 선전하는 미술활동을 하였는데, 1951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전쟁 개입으로 인한 인민군의 양구 재점령으로 인해 처형당할 위험이 커진 박수근 화백은 군산시로 피난 가고, 김복순 여사가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다고 한다.), 큰아들의 죽음(뇌염, 1948년), 넷째의 죽음(한국전쟁 기간 동안 갓난아기인 넷째가 피난길을 견디지 못함)이라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안양시 피난소를 거쳐 창신동에서 동생과 사시는 남편을 찾아온 김복순 여사,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아이들을 위해 간식을 사들고 집에 오시는 좋은 아빠였다고 한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미군 피엑스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노동을 하셨고, 당시 만난 사람이 박완서 작가이니 앞으로 작가가 될 여성과 같이 일하셨고, 평생의 후원자인 미국의 언론노동자 마거릿을 만난 시간이니 화가로서 안정된 삶을 사셨다. 부인이 알뜰하셔서 집 장만도 하셨으니 살림살이도 안정된 삶을 사셨다. KBS 예썰의 전당(한국방송)에서도 창신동에서 살 적과 미군 피엑스에서 초상화를 그리실 적에 박수근 화백이 화가로서 행복하게 산 기억을 들려주었는데, 그분의 화실인 창신동 집은 창신동 주민들에게 그림을 볼 수 있는 유명한 미술관이었다.
주로 그리는 그림은 민중들의 삶이었다. 빨래터에서 빨래노동을 하는 여성들, 기름장수(예썰의 전당에 따르면 군복무를 하는 아들이 보낸 편지를 문해자인 기름장수 아줌마가 읽지 못하자, 박수근 화백 내외분이 읽어드리고, 편지도 써드리자, 선물로 기름장수 아줌마가 드리셨다고 한다. 이 장면에서 무척 마음이 뭉클함), 나무, 아이를 보는 여자 어린이 등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그렸다.
밀레가 활기차게 민중들의 노동을 그렸다면, 박수근 화백은 민중들의 고단한 삶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그렸다고 생각한다. 이들에 대한 따뜻한 위로가 부러진 가지인 나무 그림, 잎이 싹을 틔운 나무 그림, 민중들의 삶을 그린 그림이다. 물론 삶을 같이 한 식구들에 대한 소중한 마음을 담아 집을 그리기도 하셨다니 사람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가득 담아 사신 분이었다. 노점상들에게 과일을 사실 때에도 하나씩 사셨는데, 한 분에게만 사면 다른 분들이 서운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분의 그림은 부동산 사기, 개발독재 시기에 벌어진 도시화에 따른 창신동 집 철거, 화가의 미술을 보고 평가하기보다는 파벌에 따라 상을 주는 국전(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 대한 실망(한 번은 꾸준히 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한 박수근 화가를 국전 심사위원들이 낙선시켰을 때, 두 번째는 심사위원으로서 활동하셨을 때. 성격이 때가 묻지 않은 박수근 화백으로서는 실망이 컸을 것이라고 한다.)에 대한 실망이라는 어려움 중에서도 계속 세상에 나왔다. 그에게는 박완서 작가가 인품과 교양이 있으셔서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했다고 말한 김복순 여사, 100달러를 생활비로 보내고, 미국 미술잡지에 박수근 화백을 소개할 만큼, 꾸준한 후원자인 마거릿 밀러라는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실망이 커서 가까이 한 술은 그에게 신장염, 당뇨병을 안겨주었고, 1965년 봄에 당뇨병으로 세상을 뜨셨다. 부인에게 털실로 만든 속치마를 사주지 못해 미안해하셨다고….
당시 미국 개인전을 준비하신 터라 아쉬운 죽음이다.
2023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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