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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재홍 Dec 21. 2023

김환기 화백,선을 넘는 녀석들

화가로 살다.



김환기 화백 이야기를 문화방송 선을 넘는 녀석들 컬렉션에서 보았다.
이분의 삶은 놀랍다.
첫째 지주의 아들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했다. 이분의 고향인 전남 신안군은 1923년에 암태면 소작인들이 소작쟁의를 하여, 자신들을 착취하는 친일 조선인 지주와의 계급투쟁을 한 역사가 있다. 당시 농민들의 사진을 사계절출판사 Sakyejul Publishing에서 펴낸 《교실 밖 국사여행》에서 찾아 엄마께 보여드렸더니 살아있는 눈이라고 하셨는데, 투쟁의지로 가득한 눈을 가진 농민들은 친일 조선인 지주와 결탁한 일제경찰의 탄압을 받자, 목포 지방법원 앞에서 노숙투쟁을 하였다. 1925년 《동아일보》가 하늘을 이불로 삼은 투쟁이라고 보도할 정도로 농민들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투쟁하였다. 실제 이들의 투쟁은 소작료 인하를 쟁취함으로써 농민들의 단결하는 힘만이 농민들의 삶을 나아지게 함을 깨닫게 한다.
광복 이후에 남북한 모두 경자유전법칙에 따른 토지개혁(북한 1946년, 남한 1948년)을 하여, 토지의 진짜 주인들인 농민들에게 토지가 돌아감으로써 지주계급들과 소작농민으로 나뉘는 봉건적인 지배질서가 소멸하기 전까지, 일제강점기에는 지주들이 농민들의 노동을 착취하여-우리 노동당 당원 한 분의 표현을 빌리면,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써 사는 삶은 착취”이다.-, 부를 쌓아왔다는 뜻이다. 채만식이 쓴 풍자소설인 《태평천하》(창비)에 나오는 윤 직원과 같은 자들이 지주들의 삶이었다. 이를 1942년에 부친이 위암으로 별세한 후에, 유산을 정리하다가 빚 문서를 보고 깨달은 김환기 화백은 기꺼이 유산을 포기하였다. 미술작품을 해설하는 분의 설명으로는 김환기 화백의 부친은 소작인들에게 흉년에 쌀을 빌려주고, 땅문서를 담보로 받았다. 이는 정직하게 재산을 모으고 이를 이웃들과 나눌 줄 아는 깨끗한 부자들은 절대 하지 않는 못된 재산을 모음이다.
실제로 경주 최 씨는 흉년 때에는 땅을 사거나 팔지 않고, 검소하게 살며,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않으며, 마을공동체에서 굶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지금도 고귀한 자들의 사회공동체에서의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 명문가의 조건으로 칭찬을 받고 있다.(예종석(2007), 살림지식총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살림출판사, 이덕주, 《기독교사회주의 산책》, 홍성사) 그런데 이웃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돈벌이를 한 아버지의 삶은 김환기 화백에게는 부끄러운 역사였고, 아버지가 취한 땅문서를 농민들에게 되돌림으로써 화가로서 정직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한다.
둘째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부친이 대지주의 삶을 물려받기 바랐기 때문에 일본 유학을 반대하였지만, 김환기 화백은 그림을 일본유학으로써 계속 공부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달항아리, 매화, 섬유에 점을 그린 점화, 여동생이 물을 긷는 모습(이래서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이 작가로 활동하려면, 자신만의 방과 직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나보다. 남동생은 일본 니혼 대학교에서 그림을 공부하여, 화가로서 인정을 받는데, 여동생은 물을 긷는 노동을 하다니. 분명 여동생도 소중한 재능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을 그림에 담았고, 1950년 한국전쟁 기간에는 열차에 가득한 피난민들, 배에 가득한 피난민들을 그렸다.
어머니가 별세하셨을 때에는 성심 곧 거룩한 마음을 그려서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렸다. 자신만의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뿐만 아니라 글도 아름답게 써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쓰셨을 뿐더러, 홍익대학교에서 미술교수와 학장도 하셨을 정도로 교육노동자로서도 살았고, 미국과 프랑스에서 부인 김향안 여사와 같이 유학을 하셨을 정도로 개척정신이 대단한 분이다. 물론 김향안 여사의 꾸준한 내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어서, 김환기 화백은 부인을 매우 존중하였다. 프랑스 유학을 할 때에는 미리 프랑스를 다녀와서 남편이 유학을 할 만한지 알아보셨을 뿐더러, 유창한 프랑스어 또는 불어로써 프랑스 언론과의 담화를 이었다. 그나저나 부인에게 쓴 편지에서 “비가 내리다”를 “비가 나리다”라고 쓰셨다 백석 시인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흰 눈이 나리다.”라고 쓰신 동사를 쓰셔서, 옛 우리말을 쓰시다니 반갑다고 느꼈다. 2023년 11월 5일
추신 : 환기미술관에 가자고 엄마께 졸랐더니 하시는 말씀. 언제 갈지는 모르지만, 가자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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