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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애 Apr 25. 2024

분노를 억누르는 데에도 에너지가 소모된다.

전남친(현남편)


그는 연애시절 갈등이 생기면 분노를 회피라는 방식으로 드러냈다. 싸우다 자리를 떠 버리거나, 전화를 끊어버리는 식이다. 의사소통 방식를 두고 심각하게 문제제기를 했다. 결혼이 그려지지 않는다 냉랭하게 말했다.


남편이 된 그는 불편함 감정이 느껴질 때, 회피하지 않는 대신 눈물을 흘린다. 화가 난 남편이 눈물을 흘리면 상황종료다. 내 마음이 녹아내리기 때문이다. 원래는 자리를 떠야 하는 사람인데, 노력해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남편은 평생 참는 삶을 살았다. 어렸을 때는 고약하게 말 안 듣는 누나 때문에 부모님 눈치를 봤다. 부모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그 흔한 사춘기 한번 없이 명랑하게 자라주었고 공부도 곧잘 해주었다.


사관학교에 진학에서는 4년 동안 참는 훈련을 했다. 취직을 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충성하는 삶이었다.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드러내고 표현해 볼 수 있는 사회문화적 배경이 아니었다. 받아주는 부모도 없었고, 허용되는 소속집단도 아니었다.


나는 위대한 인격자야.


참는 것이 습관이자 삶의 지혜가 된 그. 참는 행동에 대해 스스로 의미부여를 한다.

부정적인 정서는 부정적인 것 혹은 나약한 것이다.

분노는 성숙한 인격을 가진 자라면 참을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가족은 기쁜 일뿐만 아니라 슬픈 일, 화나는 일까지 함께 나누는 관계여야 한다고. 그러니 부정적인 감정을 무조건 참기보다는 함께 들여다보고 이야기 나눠보면서 적당히 표현해 보는 경험을 가져보자 했다. 표출이 아니라 표현이라는 강조와 함께.


덧붙여 내가 너의 마음을 몰라주면 누가 너의 마음을 알아주냐고 물었다.


내 남편. 연애 땐 자리를 떠났고, 결혼 한 지금은 앉은자리에서 운다. 이전에는 회피했다면 지금은 어쩌지도못하고 저쩌지도 못하는 막막함과 답답함에 부딪혀 안쓰러운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나는 남편이 더 이상 참는 사람이 되지 않게 도와주고 싶다. 부정적인 감정을 참고 억누르는 덴 에너지가 필요한데, 그 에너지가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심리학이 분노에 답하다> 책에서는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분노에 대항하고 억누르는 데도 에너지가 소모된다.
1) 신체에 공급되어야 할 에너지가 줄어들며 내분비 불균형, 면역 계통 교란을 유발한다.
2) 활기, 건강한 공격성도 함께 억눌린다.


남편의 신조는 틀렸다. 우리는 위대한 인격자가 될 필요도, 훌륭한 사람이 될 필요도 없다. 위대하고 훌륭하다는 것은 누가 판단하나? 사람에 따라, 지역에 따라, 문화에 따라, 성별에 따라, 시간에 달라지는 모호한 형용사다. 심리학자 융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그저 '나 자신'이 되는 것을 유일한 목표로 삼아야 한다.


유머코드가 달라도 그럭저럭 부부관계를 지속할 수 있지만, 분노코드가 다르면 친구가 되는 것조차 어렵다고 느낀다.


뭘 이런 걸 가지고 화를 내?


듣자마자 마음이 통째로 꼬이지 않는가? 분노는 삶을 바라보는 세계관, 뭣이 중한가 하는 가치관과 밀접하게 닿아있기 때문이다.


남편의 분노는 나에게 중요한 정보요, 신호다. 무엇이 남편의 역린을 건드렸는지 추측해 보면 역으로 남편에게 중요한 핵심신념, 가치관을 알 수 있다.


무던하게 넘어가는 순간보다 탁! 하고 걸리는 순간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아내 앞에선 분노를 참으면 안 된다. 표현해주었으면 한다. 인지하고 다루고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통해 행복한 부부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그전엔 똥, 오줌은 보기 싫은 것이었다. 후딱 변기 레버를 내렸으니.


아기를 낳으니 똥, 오줌이 다르게 보인다. 아기의 건강상태를 알려주는 중요한 지표이기 때문이다. 매번 춘이의 기저귀를 갈 때마다 똥, 오줌을 자세히 본다. 냄새도 맡아보고 모양도 보고 뭐가 들었나 본다. 어떨 땐 사진도 찍는다. 더럽지 않다. 오히려 중요하다.


그의 마음에서 흘러나온 분노. 내 딸의 몸에서 나오는 똥과 오줌을 바라보는 태도와 같은 자세로 다가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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