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주제
밋밋할 수 있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무언가가 눈에 밟히고 목에 걸리는 것을 포착하고 기록하는 일. 딸을 낳기 전까지는 해 본 적 없는 일이다. 한 주, 한 달이 다르게 커가는 딸을 양육하며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아쉬워서 메모하듯, 강낭콩의 한살이 관찰일기를 쓰듯 하다 결국 브런치 작가까지 되었다. 그동안 내가 쓴 글(공식, 비공식)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매일 1편씩 쓴 셈인데, '하루 한편 글쓰기'와 같은 거창말 말로 목표를 세웠다면 삼일을 못 버텼을 거라고 확신한다.
결혼을 하고, 딸을 낳은 후 나는 내 인생의 출발지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이 넘쳤지만 동시에 바다 위에 둥둥 표류하는 상태이기도 했던 복작복작 20대가 마무리된 것이다. 내가 죽기 전까지 뿌리내릴 곳이 여기구나. 아래로는 나의 굵은 뿌리와 잔뿌리들을 흙 속 깊이깊이 뻗어내고, 위로는 구름 띈 하늘을 보며 나뭇가지와 이파리를 키워나가는 재미가 시작되었다.
어제저녁으로 뭘 먹었는지 당장 생각나지 않고, 1년 전 내가 어떤 일로 기뻤고 슬펐는지 감감하다. 고등학교 3년은 그야말로 입시에 목 맨 생활이었다 싶다가도 그 가운데 우정도 있었고 사랑도 있었음을 어렴풋이 기억하지만 글로 남기지 않았기에 되돌아볼 수 없어 아쉽다. 대학교 4년은 말 그대로 빛나는 순간들이었는데 기록한 글이 없다. 임용시험을 준비하고 대담히 치러내던 용기도, 초임교사로 생활하며 겪어내던 좌충우돌 직장생활도 모두 증발해 버렸다. 그 시절, 그때만 할 수 있는 생각, 감정이라는 것이 있었을 텐데 아쉽다. 미련이 남아 서운하다.
그놈이 그놈이다
거기서 거기다
진부한 말들. 모두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사람들의 아쉬움을 감추기 위한 변명이다. 기록하지 않으면 돌이켜 생각해 볼 기회도, 복기해볼 여지도 없다. '네 대학생활 어땠어?'라고 묻는 질문에 '진짜 재밌었지.'라고 말하며 500원짜리 사탕 하나가 품은 풍미만큼도 살려내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본다.
주제를 주고 쓰라고 하면 정말로 못 쓰겠다. 머리는 뻑뻑하고 손은 뚝딱댄다. 시간을 들여도 안 써진다. 반면, 내 생각과 감정을 건드리는 순간에 맞딱들였을 때 한입 머금고 노트북을 켜면 두루마리 휴지를 둘둘 풀어내듯 절로 써진다. 완성도 떨어지는 글이지만 고쳐쓰기의 출발점이 될만한 글은 된다.
한 조각조각의 글을 써 모으는 것은 출판을 하기 위함도 아니고, 읽는 사람을 설득하기 위함도 아니다. 정보 전달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나에게 소중하고 인상 깊은 경험과 생각들을 쓰고, 모으다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내가 나에게서 모종의 힌트를 얻는다. 죽 펼쳐놓고 보면 '아, 이게 내 역사구나.' 싶다.
어디선가 찾아 읽은 그림책 심리학자 신혜은 교수의 글이 갑자기 귀에 종종 거린다.
"나를 건드리는 장면을 주워 모으다 보면 내 안의 모호했던 감정이나 욕구들이 퍼즐을 맞추듯 조금씩 그 윤곽을 드러내며 선명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