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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애 Apr 08. 2024

몸으로 마음을 속이자.

발표 불안


그런 순간이 있다. 마음이 좁아지고 쩨쩨해질 때, 내 선택이 후회될 때, 닥친 상황이 버거울 때, 다가올 미래가불안할 때.


마음이 그런 모양일 땐 내 몸은 이미 구부려져 있다. 온몸으로 옹졸함을 표현한다. 양 어깨는 안으로 굽어 있고 시선은 아래로 떨어진다. 왼손에 달려있는 몇 손가락엔 빳빳한 힘이 들어가 있고, 입 안의 혀는 돌돌 말려있다.


이럴 때 나는 몸을 펼치고 늘리는 전략을 쓴다.


그중에서도 '박쥐 자세'를 사랑한다. 나뭇가지가 계속 자라나는 상상을 하며 옆구리, 겨드랑이, 목, 팔을 늘인다. 발가락 끝까지 바깥으로 뻗어낸다. 미어캣 또는 발레리나가 된 듯한 상상을 하며 목이 어깨에 파묻히지 않도록 길게 뽑아낸다. 옆구리(골반에서 밑가슴까지)를 뭉근하게 늘리며 사선으로 뻗어나간다. 수줍던 겨드랑이를 활짝 연다. 손 끝은 점 점 벽에 가까워진다.







나는 오래된 발표 불안이 있다. 울렁증 정도가 아니다. 대학교 1학년 1학기 교육심리학 시간에는 비고츠키 관련 발표를 하다 그 자리에서 펑펑 운 적도 있다. 발표 상황이 주는 긴장과 압박감을 이겨낼 수 없었다. 잡아 먹혔다.


어쩌다 입학한 대학원. 대학원은 강의식이 아니라 발표식 수업이 주를 이루고 있는 줄 몰랐다. 수업 내용은 어렵고, 옆 친구들은 똑똑하고, 교수님은 늘 화가 나있었다. 발표, 질의, 응답 시간마다 나는 과호흡은 기본이요 염소 목소리까지 겸비하곤 했다. 사정없이 붉어지는 얼굴은 덤으로.


2주마다 돌아오는 발표를 자그마치 2년 동안 이런 식으로 할 수는 없었다. 하는 나도 존나 쪽팔리지만 보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힘들까? 아무리 '나는 잘할 수 있다.'를 되뇌고 정신무장을 해도 소용 없었다.


요가 동작을 응용해 자신감이 넘칠 때 할 수 있는 동작을 의식적으로 취함으로써 불안한 마음을 속여보기로 했다.



발표 전

몸을 크게 만든다. 핵심은 크게 만드는 것이다.

가슴을 부풀리며 앞으로 펼쳐낸다. 기지개 켠다.

입도 크게 벌려본다. 아, 에, 이, 오, 우.


발표 중

큰 동작으로 불안한 마음을 계속 속인다. 다리를 다소곳하게 모아 서지 않는다. 금방 불안해지므로. 어깨너비로 넉넉하게 선다. 손으로 PPT화면을 가리킬 때는 높고 길게 뻗는다. 가슴 앞에서 손을 쪼물딱, 깔짝깔짝 대지 않는다.



요가자세를 활용한 발표 수행 전략이었는데 대성공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Biofeedback 또는 Bodymind라는 이름으로 활발히 논의 중인 개념이었다.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음과 몸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쌍방향 의사소통 관계였다.


자세를 의도적으로 크게 만들면 뇌에서는 '어? 지금 자신만만한 상황인가 봐.'라고 판단한다. 뇌의 신호를 전달받은 마음은 실제로 자신만만해진다. 덕분에 순탄하게 발표를 할 수 있다. 나는 스피치 학원도 아니요 음성치료도 아니요 정신의학과도 아니요 내가 10년 넘게 수련해 온 요가로 발표 불안을 극복할 수 있었다.


마음이 줄면 몸을 늘이자.

오래도록 고마울 나의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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