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즙 용도의 재발견
셋째를 임신한 아내님은 시도때도 없이 졸음이 쏟아진다고 한다. 둘째가 포도즙으로 내 책상을 초토화시킨 그날도 졸음을 참기 힘들었다고 했다. 잠결에 첫째가 자신을 깨우며 둘째가 말썽을 피우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으나 이미 잠에 취해버린 아내님은 일어날 수 없었다. 그저 물장난을 치다가 옷이 젖었거나 첫째가 그린 그림을 망쳤거나 아니면 아내님의 미술도구를 부러뜨렸거나 하는 일을 일상적인 말썽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꿀잠의 대가는 가혹했다. 잠에서 깬 아내님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믿지 못한 채 한참을 멍하게 서있었고, 정신을 차린 후에는 둘째를 향해 샤우팅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한다.
아내님은 사진을 찍어 나에게 전송해 주었다. 사진을 받아 본 나는 둘째의 개구진 모습을 상상하며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깨끗하게 집안 청소를 마치고 자다 일어난 아내님에게는 날벼락이었지만 나에게는 그저 말썽꾸러기 둘째의 애교로 받아들여졌다.
집에 도착한 나를 보자마자 아내님은 고해를 했다.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해 둘째에게 화를 냈고 너무 미안하다고 했다. 아무리 성인군자라도 이 상황에서 어떻게 화를 내지 않겠냐며 아내를 위로해 주었다. 만약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내보다 더 크게 화를 내고 아이를 야단쳤을 것이다. 둘째가 사고를 친 책상은 내 것이었고 오랫동안 사용하면서 상당히 노후화되었기에 꽤나 조심스레 사용하고 있었다. 더구나 책상 위에 다른 물건이 어질러져 있는 것만봐도 불편함을 느끼는데 난데 포도즙이라니!!! 다행히도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깨끗히 정리되어 있었고 향기로운 포도즙향기만 남았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이들과 놀아주었다.
그런데 아이가 왜 책상에다 포도즙을 뿌려놓았는지 궁금증이 가시질 않았다. 그 이유를 알아야 다음에 이런 일을 사전에 방지하거나 재발하더라도 아이에게 조금 더 다정하게 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도 아닌 무려 다섯개씩이나 범행(?)에 사용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둘째가 한창 기분 좋게 놀고 있을 때 슬쩍 물어보니 대답을 피했다. 내가 또 혼낼까봐 무서웠나 보다. 어쩔수 없이 둘째에게 더 물어보는 것을 포기하였으나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첫째에게 물어보았다. 그런데 첫째는 그 정확히 이유를 알고 있었다.
비 오는 날 자동차 도로를 만든 거잖아. 아빠는 그것도 몰라?
꽤 오래 전 비가 오는 날이었다. 물건을 찾으러 잠시 외출할 일이 있었는데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둘째는 나와 함께 가기를 원했다. 달리는 차안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창밖을 바라보며 아이는 연신 질문을 던지며 즐거워했다. 매번 같은 자동차들, 비슷한 자연환경을 보면서도 새로움을 찾는 것 같아 신기했다. 아이를 따라 자세히 보니 비가 와서 그런지 조금 달라 보이기도 했다. 불투명하게 말이다. 여하튼 아이는 내리는 비를 바라보면서 매일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빠차를 깨끗히 씻어줘서 고맙고 나무가 잘 자랄 수 있어서 고맙고 공기가 깨끗해져서 고맙다고 했다. 멍구름이라는 동화에서 비는 세상을 깨끗하게 씻어주는 고마운 존재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아이는 그 이야기를 철썩같이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혹은 내가 세차를 잘 안해서 정말 더러운 차를 씻어주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ㅎㅎㅎ 물웅덩이를 지나갈 때 사방으로 흩어지는 물을 보면서도 꺄르르 웃어재재끼며 좋아했다. 그런 아이와 함께 하는 드라이브가 꽤나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쩌면 아이는 아빠와 함께 다녀온 그 길을 다시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내 기억에서는 비오는 날의 그저 흔한 하루였는지 모르지만 아이에게는 그 순간이 온전한 즐거움이었나 보다. 빗길을 달리며 아빠와 나눈 이야기, 무지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는 산, 각양각색의 자동차들을 추억하며 그날의 즐거웠던 감정을 느끼고 행복에 빠져있었을 아이였다. 그런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건 아직도 내가 한참 부족한 탓일 테지... 약간의 반성과 작은 깨달음으로 사랑을 가득담아 아이들을 안아 주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하는 일상적인 하루도 축복임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아이들이 처음 우리에게 온 날을 잊지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윤아, 율아. 우리에게 와 줘서 정말 고마워. 사랑해. 축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