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즐거움
내가 사는 아파트에는 고양이가 많이 산다. 맞다. 집에서 키우는 고풍스러운 고양이가 아니라 아파트 주위를 배회하는 그런 들고양이 말이다. 아내님 말에 따르면 우리 아파트는 고양이들의 성지라고 한다. 25년된 오래된 아파트답게 군데군데 고양이들이 쉴만한 곳이 많다. 지하주차장이 없기 때문에 1층 외벽의 좁은 틈은 고양이들에게 훌륭한 아지트가 된다. 겁이 없는 녀석은 아예 아파트 내로 들어와 몸을 녹이기도 한다. 사람의 손을 많이 타서 그런지 낯선사람을 봐도 도망가지 않고 '아저씨, 나 여기 있어요. 먹을 거라도 좀 주고 가세요.'라고 말하는 듯 연신 '냐아~ 냐아~' 거린다.
요즘처럼 카드를 찍고 음식물쓰레기를 버리는 시스템도 없거니와 쓰레기 분리수거장이 별도로 없는 것도 고양이들을 끌어모으는데 한 몫한다. 어제만해도 야식을 사기위해 편의점을 갔다오는데 쓰레기봉투를 무자비하게 해체한 후 그 속을 뒤지는 검은고양이 네로(내가 이름 붙혔다)를 발견했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없는 줄 알고 걷다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한밤중에도 광선을 내뿜는 그의 눈에 순간 놀라고 말았다. 네로 역시 야식이 땡겼을 거라는 생각과 나중에 경비아저씨가 네로의 만행을 발견하면 또 한 소리 하겠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락부락한 외모와는 달리 고양이를 엄청 좋아하는 경비아저씨라서 고양이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다. 매번 벌어지는 일상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근처 고양이들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니 어찌보면 우리 아파트 경비아저씨들은 이미 집사로 전락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아파트 주변에 워낙 고양이가 많다보니 하나씩 알아보기는 힘들지만 유독 눈에 잘 뛰는 녀석이 하나 있다. 야옹이라고 이름 붙힌 그 고양이는 흰색 바탕에 등쪽에 옅은 노란색 무늬(반대로 노란색 바탕에 흰색 무늬일 수도 있다)를 가지고 있다. 고양이답지 않게 얼마나 게으르고 여유로운지 여름에는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곳이라면 도로 한 복판에서도 발라당 누워 일광욕을 하기도 하고 겨울이면 따뜻한 엔진열을 흡수할 수 있는 본네트 위나 자동차 바퀴틈에 움크려 몸을 데피곤 한다. 한 번은 내 차를 빼야하는데 바퀴 옆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는 그녀석 때문에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다.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며 '냐앙~ 냐앙'하는 것이 나에게 '방해하지 말고 저리 가라, 집사'라고 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게으르기만 한 그 녀석은 조금씩 사람을 경계하고 행동이 민첩해지기 시작했다. 아내님의 추측에 따르면 새끼를 가진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아무리 보아도 모르겠다. 역시나 고양이 답지 않게(?) 살이 축 늘어진 그 모습은 그냥 비만 고양이에 가깝다고 여겨졌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 아침 우유를 사러 나간 길에 본 야옹이는 며칠 사이에 다이어트라도 했는지 수척해 보였다. 그동안 트레이드 마크처럼 여겨졌던 볼살도 쏙 빠져서 마치 다른 고양이처럼 보였다. 수풀 속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더니 한참동안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꼬리까지 완전히 빠져나온 후에도 주변을 경계했다. 왠지 야옹이를 방해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허수아비처럼 뻣뻣하게 멈춰 서고 말았다. 야옹이는 나를 발견한 건지, 아니면 나는 그냥 무시하는 건지(은근 열받네!) 여하튼 수풀을 향해 '냐아~ 냐아'라고 아주 작게 소근거렸다. 그러자 손바닥만한 아기 고양이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도 색깔도 각기 다른 고양이가 하아아아아아아나, 두우우우우우우울, 세에에에에에에엣...... 네엣?! 총 4마리가 줄줄이 기어나왔다. 무심한 건지 장난기 가득한 건지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표정으로 엄마 뒤를 졸졸졸 따르는 모습이나, 제대로 걷지 못해 비틀거리는 모습마저 어찌나 귀여워 보이던지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가득 번졌다. 나는 그렇게 한껏 긴장한 엄마와는 대조적으로 조심성이라고는 1도 없는 모습으로 엄마 뒤를 따르는 아기고양이들을 한참동안이나 바라보았다.
마지막 새끼 고양이의 방정맞게 실룩거리는 궁뎅이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내가 미완성된 석상처럼 어색하게 서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시간과 공간감각마저 잊게 만드는 고양이들. 이래서 다들 집사가 되는구나 싶었다. 겨우겨우 시공간에 흩어진 정신을 붙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왜 이렇게 늦었냐는 아내의 질문에 "우리도 고양이 키워볼까?"라고 나도 몰래 되묻는 걸 보니 고양이에게 홀려도 단단히 홀렸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