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부부가 되었습니다
'사토라레'라는 영화가 있다.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는 두뇌를 가진 주인공이 생각하는 것을 주위 사람이 들을 수 있다는 설정이었다. 마치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처럼 주위 모든 사람이 그의 생각을 읽었다. 그나마 선함의 끝을 보여주는 주인공이었으니 망정이지 나였다면 참 불행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을 남이, 심지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다 들여다볼 수 있다는 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음란마귀가 끼었는지 모르겠지만, 매력적인 이성을 보고 약간 므흣한 생각을 했는데 배우자에게 내 생각을 읽혔다는 상상을 해봤다. 그리고 곧 상상만으로도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해질 수 있는지 깨달았다;;;). 여하튼 이렇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가능성이 다분했기에 참 불편한 능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는 나에게 그 주인공을 닮았다고 했다. 물론 뛰어난 두뇌의 주인공처럼 뇌섹남이라는 칭찬이 아니었다. 내 기분에 맞지 않은 이야기를 들으면 바로 얼굴에 티가 난다는 의미로 한 이야기였다. 정말 그랬다. 이전에 나는 아내가 이야기를 할 때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했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며 무시했고, 경제적 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과시했고, 가장의 권위를 내세우며 강압했다. 실제로 말과 행동에서는 그러지 않았을지언정 내 표정은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생에 진정한 친구 하나면 충분하고
둘은 너무 많고, 셋은 불가능하다
헨리 아담스가 했던 말로 기억한다. 전적으로 동의하는 말은 아니지만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성격이기에 진정으로 내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친구는 딱 한 명만 곁에 두고 살아왔다. 아내 역시 계모임을 하는 친구가 4명이나 되지만 그중에 진심으로 말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는 딱 한 명이라고 시인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머지 3명에게조차 쉽게 터놓는 이야기마저도 나에게는 쉬이 터놓지 못했다. 조금 억울했다. '그래도 명색이 남편인데 어째서 순위에도 못드 거지? 나만한 남편이 어디 있다고 그래? 돈 잘 벌어다 줘, 밥하고 집안일도 잘해줘, 혼자 아이들을 돌보면서 아내에게 자유시간까지 줘! 도대체 얼마나 잘해줘야 만족할 건데? 내가 너무 잘해줘서 복에 겨웠네.' 삐딱선을 탄 나는 언제나 아내를 탓했고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란 막연한 기대를 가지기도 했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어느 정도 시간에 비례하긴 하지만 정비례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과는 만난 시간이 짧더라도 급속히 친해지는 반면 다른 어떤 사람은 함께한 시간은 많지만 그 관계가 깊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다. 실제로 수십 년을 함께 한 부부들이 모두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은 관계가 단순히 시간의 길이에 따라 깊어지지 않는다는 반증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아내와 그저 그런 관계로 전락하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다. 서로에게 감사하며 사랑하고 진심으로 함께 성장하는 소울메이트가 되고 싶었다(그리고 아내의 계모임 친구들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고 싶었다!!). 진정으로 아내를 위해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명상을 하던 어느 날 작은 깨달음이 찾아왔다. 단순히 표정관리를 하면서 '거짓된 사토라레'를 표현하기보다는 '긍정적인 사토라레'를 보여줘야겠다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육아휴직은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남들보다 승진이 늦어지고 경제적 여건은 제자리걸음에 회사가 나에게 주는 평가는 처참했을지 몰라도 나 자신과 아내와 아이들과의 관계는 더없이 좋아지는 기회이자 축복의 시간이었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아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늘었다. 단순히 이야기만 듣는 것이 아니라 말할 때 느껴지는 감정과 다양한 표정 변화까지 세세하게 느낄 수 있었다. 처음이었다. 아내의 순수한 눈을 유심히 바라본 것도, 조그마한 입술이 쉴 새 없이 오므렸다 펴지는 것도, 가끔씩 콧구명이 앙증맞게 벌렁거리는 것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아내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는 게 신기했다. 마치 오늘 처음 만난 사람처럼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놀랍고 신선한 경험에 감사하면서도 이면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 8년 동안 아내를 진심으로 대하지 못한 자책이었다. 아무리 소리쳐도, 힘들다고, 도와달라고, 내 이야기만이라도 들어달라고 절규함에도 불구하고 메아리 없는 남편이라는 공허함에 아내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리고 또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 이거 아무한테도 얘기 안 했다. 오빠한테만 얘기하는 거야.
이제는 오빠가 제일 친한 친구가 된 거 같아서 편하거든.
여느 날처럼 사소한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아내는 웃으며 말했다. 내가 느낀 기쁨이 두 방울로 떨어지는 추태를 보이는 바람에 바로 답하지 못했지만 아내는 분명 내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나는 사토라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