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케파를 키우다
"내리사랑이라고 첫째보다는 둘째가 더 예쁘대."
둘째 출산이 임박했을 때 아내가 말했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당시 첫째는 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기아기 한 모습이었고, 언제나 나를 돌아보게 하는 작은 스승이자 동반자였다. 쉽게 말해 사랑의 결정체였다. 둘째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이미 완벽한 사랑을 형성한 우리 사이에 끼어드는 불청객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둘째는 참 어렵게 태어났다. 자연분만을 하고 싶어 했던 아내의 요청에 꼬박 하루를 희생했으나 아이는 나오지 않았고 결국 제왕절개를 했다. 그 과정에서 아이는 태변을 삼켰다. 의료진의 조치에 위기는 넘겼지만 3주간 중환자실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아이를 힘들게 했다고 자책했고, 한 달이 다되도록 아이를 한 번 안아주지 못한 것을 괴로워했다. 나 역시 조그마한 아이가 여기저기 주삿바늘을 꼽은 채 차가운 인큐베이터에 있는 것이 못내 그립고 미안했다. 그 마음이 컸던 탓일까? 둘째는 예쁜 짓을 하지 않아도, 심지어 매번 사고를 쳐도 마냥 예뻐 보인다.
그렇다고 둘째를 더 편애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첫째 역시 보고만 있어도 사랑스럽니다. 특히나 첫째의 경우에는 언제나 내게 깨달음을 주는 작은 스승이기에, 사랑과는 조금 다른 존경심? 경외감? 이런 감정이 섞여있다. 말로 잘 표현하진 못하겠지만...... 첫째는 첫째대로, 둘째는 둘째대로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미묘하게 다르다.
실제로 사랑의 종류는 다양하다.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이성을 향한 사랑이 있고, 자식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불길에 뛰어든 부모의 사랑도 있으며, 스승과 제자, 혹은 친구와의 사랑도 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랑 중에 어떤 것이 더 크고 위대하다고 단정할 수 없다. 각자의 사랑은 그 자체로 완벽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첫째를 대할 때 느끼는 사랑과 둘째를 대할 때 느끼는 사랑, 그리고 아내를 대할 때 느끼는 사랑이 조금씩 다르다. 그 다름을 조금이나마 이해했을 때 내리사랑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렸다.
내리사랑은
당신에게서 첫째로,
첫째에게서 둘째로
사랑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각자의 사랑이 만나고 함께 흐르면서
더 맑고 깊어지는 것 같아.
내 말에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 역시 3이라는 사랑을 나와 아이들에게 각각 하나씩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생길수록 사랑이 배수로 증식되어서 똑같이 3씩 나누어 주는 기분이라고 했다. 쉽게 말하면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는 케파(capacity)가 훨씬 커졌다고 할까? 내가 몰랐던 사랑의 다양성을 깨닫고 배우며 내 사랑의 캐파를 키우는 것. 그것이 진정 내리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유홍준 교수님은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하셨다. 나의 경우, 아이를 통해 다양한 사랑을 알게 되는 것만큼 더 많은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곧 셋째가 나오면 우리가 가진 사랑의 케파 역시 늘어날 거란 기대에 몹시 기다려진다. 그리고 그 사랑을 가족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서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어렵고 힘든 시기일수록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사랑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