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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Jan 16. 2020

교회와 세상에 대한 두 교황의 신학적 대화

영화 <The Two Popes> 후기 (2019)

영화 <The Two Popes> 후기 (2019)

교회와 세상에 대한 두 교황의 신학적 대화

‘보수와 진보의 갈등 그리고 대화를 통한 해결’, 이것이 이 영화를 바라보는 대체적인 시각인 것 같다.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과, 역사의 합법칙성에 따른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중시하는 사람들 사이의 다양한 상호작용이 역사의 중요한 축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보수와 진보의 시각으로 이 영화를 해석하는 것도 일견 타당하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내레이션, 프란치스코 성인이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십자가상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전해지는 그 말씀, “나의 집을 고쳐라” (Repair my Church)에 주목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그리스도의 이 명령에 대한 두 교황, 즉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대화라는 생각이 든다.


두 교황이 나눈 네 개의 대화로 구성된 이 영화는 지극히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첫째 날 교황의 여름 별장 정원에서 나눈 한낮의 대화와 거실에서 나눈 저녁 대화, 둘째 날 로마 교황청으로 돌아와 시스티나 경당에서 나눈 대화 그리고 경당 안에 있는 ‘눈물의 방’이라고 불리는 제의실에서 나눈 대화가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두 교황은, 시간과 공간을 옮겨가며 나눈 네 개의 대화를 통해 교회가 당면한 많은 현안들, 신학의 근본적인 질문들, 개인적인 신앙 경험 등에 대한 격렬한 토론과 서로 매우 다름에 대한 이해를 거쳐 마지막에는 서로에게 고해성사를 청하게 된다. 그리고 베네딕토 16세는 자신과는 너무나도 다른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성 베드로의 열쇠’를 넘기겠다는 생각을 확고하게 굳힌다.


공의롭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두 교황의 대화를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공의로움’으로 교회를 고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세상과 교회가 겪고 있는 문제의 본질은 ‘타락’이며 이에 대한 심판을 통해 하느님의 공의로움을 다시 드러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혼탁한 변혁의 시대에 정신적 질서 원리를 제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치 5세기 서로마 제국 멸망 후, 전 유럽이 혼란의 와중에 있던 격동기에 수도원을 창설하고 수도 규칙을 정립하면서 ‘기도와 노동’이라는 지표를 제시했던 베네딕토 성인을 본받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첫째 날 여름 별장 정원의 한낮 대화에서 “변화는 타협입니다. 신은 변하지 않습니다” (Change is compromise. God does not change)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실제로 그는 교회 안에서 확산되고 있는 세속주의와, 도덕적 진리를 부정하는 상대주의를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반면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비로움’으로 교회를 고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영화 <Pope Francis: A Man of His Word, 2018>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세상의 심각한 불평등을 지적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 함을 힘주어 강조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첫째 날 여름 별장 정원의 한낮 대화에서 “교회가 더 이상 이 세상의 일부가 아닌 것 같습니다” (It seems to me that we are no longer part of this world) 라며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둘째 날 시스티나 경당 눈물의 방 대화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에게 고해성사를 주며 이렇게 말한다. “진리가 중요하지만 사랑이 없으며 견딜 수 없습니다. 진리 안의 사랑!” (The truth may be vital, but without love, it is unbearable. Caritas in veritate!)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자신이 선택한 이름처럼 인간과 자연에 대한 넘치는 사랑과 청빈한 삶으로 13세기 중세 유럽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던 프란치스코 성인을 본받으려 한 것이리라.


‘보잘것없는 이들에 대한 구원의 선포’


두 교황의 대화를 ‘공의로움과 자비로움’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면서 <마태오 복음 11장 2절~11절>의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문답’에 대한 무척 인상적이고 강렬한 미사 강론이 생각났다.


(세례자 요한 問)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答)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그날 미사 강론에 의하면 대제사장의 자손인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직접 고행을 하며 당시의 기득권층을 향해 정의와 심판 그리고 하느님의 처벌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강력히 전하며 회개를 강조한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상대적으로 조용히 병자들의 치유와 가난한 이들의 위로에 전념하였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일의 핵심은 나약하고 소외된 이들, 죄지은 자들의 구원인 것이다. 미사 강론은 마지막으로 이사야서의 구절을 인용하며 하느님의 자비하심 즉 ‘보잘것없는 이들에 대한 구원의 선포’를 강조하고 마무리되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두 교황의 대화와 그날의 미사 강론이 겹쳐지면서 ‘하느님의 공의로우심과 자비로우심은 언제나 교회의 신학적 대화였구나,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대화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의로움과 자비로움’이라는 실천적 가치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때로는 원칙과 질서를 정립하여 엄격하게 견지해야 하고 때로는 따뜻하게 포용하는 마음을 실천해야 한다. 물론 원칙과 질서가 독선이나 소외로 변질되지 않아야 하고 또한 포용이 무원칙과 무질서로 귀결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공의로움과 자비로움’이 우리가 보다 나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덕목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리고 蛇足, 두 교황의 대화가 지적이면서도 겸손하고 격렬하면서도 품격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영화 도입부에 나오는 이 대사가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어떤 여정이라도, 아무리 영광스럽더라도 실수로부터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은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Any journey, no matter how glorious, can start with a mistake. So, when you feel lost, don’t worry. God will not give up.)


<사진> 제주도 금악성당 다미아노십자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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