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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 Apr 06. 2020

'잘 가요! 엽사부' 혹은 대륙의 별 오성홍기의 격문

영화 <엽문 4 : 더 파이널> 후기 (2019)

홍콩 영화에는 크게 두 갈래의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가부장적 질서와 유교적 세계관의 대륙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경극과 중국 무술 동작을 도입하여 만든 60~70년대 검술영화 흐름으로 주로 대륙 출신 감독들이 주도하였다. 또 하나는 초기 검술영화의 흐름을 해체하면서 기존 홍콩 영화의 전통과 서구 영화의 텍스트를 혼합하여 재구성한 1980년대 홍콩 느와르 – 이 용어는 한국에서 만들어졌으며, 본격적으로 그 본색을 드러낸 영화는 <영웅본색>이다 – 의 흐름이다. 견자단의 <엽문> 시리즈는 60~70년대 검술영화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엽문>은 영춘권의 일대종사(一代宗師, The Grandmaster)이며 전설적인 쿵후 스타 이소룡의 무술 스승인 실존인물 ‘엽문’을 그린 영화인데, <엽문 1>(2009년) - <엽문 2 : 종사전기>(2010년) - <엽문 3 : 최후의 대결>(2015년)에 이어 <엽문 4 : 더 파이널>(2020년)로 지난 11년간의 긴 여정이 완결되었다.


검술영화의 흐름을 이어받은 영화 <엽문>은 무술 액션과 서사가 혼합되어 영화를 끌어 가는 구조이다. 1930년대 광동성을 배경으로 한 <엽문 1>은 일본군 가라데 고수와의 ‘10人 대련’ 액션과 무예를 익힌 자로서 불의와 부당함에 눈감지 않고 맞서야 한다는 정의감 그리고 중국을 침략한 일제의 핍박에 대항하는 항일의 서사를 가지고 있었다. 195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한 <엽문 2 : 종사전기>에서도 홍콩 무술가 연맹의 맹주 홍 사부와 벌이는 ‘원탁 위의 대련’ 액션과 영국 식민지배 하의 벌어지는 불의함을 지적하며 ‘상호존중의 미덕’을 강조하는 서사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엽문 1~2편에서는 강하고 빠른 영춘권의 무술 액션과 불의에 당당하게 맞서는 검술영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또한 민족주의 서사를 드러내고 있다. 유명한 헤비급 복싱선수로 전설의 주먹으로 알려진 마이크 타이슨이 출연한 <엽문 3 : 최후의 대결>은 1~2편의 흐름에서 벗어나, 민족주의적 서사보다는 화려한 무술 액션 중심으로 만들어진 영화였다.

 

완결편인 <엽문 4 : 더 파이널>은 다시 1~2편의 흐름을 이어가는 영화다. 게다가 견자단 엽문 시리즈 11년간의 여정이 종결되는 의미를 담고 있는 영화, ‘잘 가요! 엽 사부’의 그리움과 아련함 그리고 완성을 담고 있는 영화다. 희끗해진 귀밑머리와 함께 중장년에 접어든 엽 사부의 무술은 절제감과 정확함이 쌓이면서, 필요한 만큼 빠르고 강하며 더욱 치명적인 타격감을 보여주고 있다. 암으로 투병 중인 엽 사부가 제자 이소룡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해, 아직 장성하지 않은 아들의 앞날을 위해 학교를 방문하고 추천장을 부탁하러 다니는 모습은 평범하고 따뜻한 父情을 느끼게도 한다. 또한 낯선 나라의 이민자로 살아가며 차별받는 중국인들의 애환을 보면서, 적극적으로 미국인들과 대화하고 불의에 대해서는 비굴하게 타협하지 말고 당당히 맞설 것을 역설하는, 공명정대한 대인의 모습도 보여 준다. 삶의 끝자락에 서있는 일대종사의 고요함이며 한결같음이다.


한편 1~2편에서 보여주었던 민족주의 서사는 <엽문 4>에서도 나타난다. 1편과 2편은 각각 1930년대 일제의 중국 침략과 1950년대 영국의 식민지 홍콩이라는 중국의 역사적 현실을 바탕으로 민족주의 서사를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 <엽문 4>가 다루고 있는 민족주의 서사는 무엇일까?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 미국의 중국인 이민사회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서, 미국인들은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과 부당한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너네 나라로 돌아가. 여긴 대대로 우리 땅이었으니까. 뭘 빼앗으러 온 거야?" "왜 동양인을 받아주는지 이해가 안 돼요. 이민국 차원에서 야만인들을 몰아내야죠." 이런 가운데 미국 이민국 국장과 다소 난데없긴 하지만 미 해병대 중사까지 나서서 중국 이민사회에 대한 왜곡된 혐오와 부당한 폭력행위를 자행한다. 이에 맞서는 엽 사부는 큰 소리로 “그만해”라고 외치며 홀연히 필마단기로 미 해병대 군영에 뛰어들어 가라데 고수 미 해병대 중사와 ‘룰이 없는’ 대결을 펼치고 끝내 승리한다. 그야말로 증오와 편견 그리고 부당한 폭력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서 승리한 것이다. 인류 보편적 가치의 승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연 <엽문 4>의 서사가 중화민족주의를 넘어 차별과 혐오에 대한 반대와 극복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


“당신의 패권은 순전히 증오와 편견!” 
미국을 향한 <엽문 4>의 항변이다.


2018년 12월 중국 외교부는 미중 수교 40주년이 되는 2019년을 맞이하면서 앞으로의 미중관계를 ‘합즉양리 투즉구상 (合则两利 头则具伤, 화합하면 양측 모두 이로울 것이나 싸우면 모두 다친다)’이라고 요약하였다. 이에 대해 국제 외교가에서는 美中 관계의 상호 긴밀성과 우호를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미국의 때리기에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라는 중국의 의지가 표명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양국 관계의 험난함을 경고한 것이다.


지난 2018년 3월 트럼프 대통령이 통상법 301조 즉 슈퍼 301조에 의거하여, 중국의 지적재산권 침해에 따른 추가 관세 부과와 중국기업의 대미 투자제한 등의 내용을 담은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발발한 양국 간의 무역분쟁은, 지난 2년여 동안 추가 관세 대상 확대, 휴전 선언과 공식 협상 재개, 미국의 중국에 대한 환율조작국 지정 등을 거치며 세계경제를 위축시키는 무역전쟁으로 확전되는 양상이다. 또한 전 세계의 지정학적 위기 성격을 드러내면서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즉 안미경중(安美經中)의 구도를 유지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을 미국 혹은 중국이라는 양자택일의 상황으로 내몰면서 국제질서의 변화마저 초래하고 있다.


한편 ‘거의 전쟁상황’이라는 美中갈등 속에서 양국의 결전 의지는 대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먼저 미국 상황을 보면, 대중국 강경파로 알려진 펜스 부통령은 두 차례 연설에서 미국의 對중국 전략방향을 밝힌 바 있는데, 첫 번째는 ‘美행정부의 중국정책’ (2018년 10월, 허드슨연구소)이라는 연설이다. 미국 언론이 중국에 대한 ‘新냉전 선언’으로 평가하는 이 연설에서 펜스 부통령은 ‘불순한 대외정책, 특히 중국의 중남미 진출과 미국 선거개입 등’을 지적하며 “미국은 중국에 대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대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두 번째는 ‘美中관계의 미래’ (2019년 10월 월슨센터)라는 연설에서 ‘중국의 비윤리적인 무역관행과 인권유린을 질책’하면서 ‘미국은 공정성과 상호 존중, 국제 무역규칙을 바탕으로 중국과의 협력관계를 추진할 것‘이라고 언급하였다. 하지만 펜스는 이 연설에서 당시 홍콩사태와 관련하여 “지나온 한 해를 돌이켜 볼 때, 홍콩 소요사태만큼 중국 공산당이 자유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사건은 없었다”라고 강조하였다.


미국 내에서 중국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거의 사라진 상태이며 여야 구분 없이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에 ‘중국 위협론’이 확산되었다. 미국 조야의 對중국 정세판단은, 중국이 국제규범·규칙·제도를 준수한다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중국 중심의 지역 및 세계 구도, 제도와 규범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미국에 대한 동맹과 국제사회의 신뢰가 약화되고 있는 상황을 활용하여 중국이 협력 세력을 확보하고 중국 중심의 협력망과 체제를 구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주변국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적극적인 군사력 증강으로 힘의 역외 투사능력을 강화하여, 최소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미국의 군사력 접근 거부 능력을 확보함으로써 패권세력으로 부상하려 한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미국이 중국을 미국의 이익에 반하여 세계를 재편하려고 하는 ‘수정주의 국가(revisionist power)’로 규정하면서, 對중국 전략 방향을 ‘협력과 경쟁에서 견제와 대결’로 전환’하였다는 것이다.


중국의 대응도 강경하다. 지난 2019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4일간 북경에서는 중국 공산당 제19기 전국대표회의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 즉 사중전회(四中全会)가 개최되었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중전회(中全会)는 중국 공산당이 중국을 통치하는 실질적인 최고 통치기구이다.


중국 공산당은 9,000만 명이 넘는 당원을 대표하는 2,000여 명 규모의 전국대표대회를 5년마다 소집해 5개년 국정목표를 정립하고, 이를 실행할 200여 명 규모의 당 중앙위원회를 구성한다. 중앙위원회는 다음 전국대표회의까지 5년간 총 7회의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즉 중전회(中全会)를 열어 黨政의 주요 인사, 국가운영방향, 각종 주요 정책현안과 지도노선 등을 결정한다. 다시 말하면 중전회(中全会)는 다음번 전국대표회의가 열리기까지 5년 동안 사실상 중국 공산당의 모든 업무를 지도, 관장하는 ‘최고 의사결정 회의체’이다. 또한 당 중앙위원회는 최고 영도 기관인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현재 7명)과 최고 권력자인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선출하고, 중국 공산당 권력의 원천인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도 결정한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와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겸직하여 ‘당이 곧 국가’인 중국 정치체제에서 행정권과 군권 모두를 장악해 최고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 즉 사중전회(四中全会)가 ‘국내외로 직면하게 된 위험과 도전이 현저히 늘어난 복잡한 국면’이라는 중국 지도부의 정세 인식 하에 열렸다. 당시 중국이 ‘국내외로 직면하게 된 위험과 도전’의 구체적인 내용은 美中 무역분쟁 장기화, 홍콩사태, 중국 경제 둔화였으며, 사중전회(四中全会)는 이와 같은 ‘복잡한 국면’에 대응하기 위해 국가 안전문제를 강조하면서 ‘국가 통치체계 공고화’와 ‘일국양제 강화’를 핵심 사안으로 논의하였다.

 

사중전회(四中全会)의 결과보고인 공보(公報)는 ‘당 중앙(당 중앙위원회를 의미)의 권위를 결연히 옹호하고 당의 영도가 국가 거버넌스 각 분야에 구현돼야 한다’고 언급해 중국특색 사회주의 제도, 즉 시진핑 체제의 장점을 견지하고 더욱 발전시킬 것을 공언하였다. 특히 시진핑 주석이 당 중앙위원회의 핵심이며 당 전체의 핵심 지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수호할 것과 시진핑 강군 사상이 인민군대에서 지도적 지위를 공고히 해야 함을 강조하여 시진핑 주석 체제가 더욱 강화되었다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또한 시진핑 체제 수호를 위한 ‘국가 통치체계 및 능력의 현대화 추진목표’를 제기하면서, 두 개의 100년 즉 공산당 창건 100주년이 되는 2021년과 건국 100주년인 2049년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제도 구현 목표를 강조하였다.


한편 일국양제(一国两制) 강화와 관련하여 기존의 ‘일국양제’ 논의가 홍콩 자치를 허용하는 ‘양제(两制)’가 중심이었다면 이번 사중전회(四中全会)에서는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일국(一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다는 평가이다. 또한 중국 정부가 표명하고 있는 ‘홍콩인이 홍콩을 통치한다’는 ‘항인항치(港人港治)’ 원칙도 “모든 홍콩인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홍콩인 중 애국자가 주체가 되어야 함”에 방점이 찍혀 있다. 국가주의 강화이다.

 

이처럼 지난 사중전회(四中全会)에서 ‘시진핑 체제 수호’ 및 ‘국가주의 강화’가 중국의 향후 주요 국가전략과제로 강조되자, 국내외 불안정 요인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 공산당이 당분간 급격한 정책 변화와 지도부 변동보다는 ‘현재의 시진핑 체제의 권위 강화’에 집중해 난국을 타개하려는 의지를 천명했다는 해석과 평가가 나오고 있다. 국가적 일대회전을 앞두고 전열을 정비하는 모습이다.


이처럼 더욱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美中 갈등은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 상황에서 양국의 코로나 바이러스 최초 발원국 논란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 나타난 양국의 체제 우월성 경쟁과 상호 거부감 등 오히려 팬데믹을 기점으로 美中 갈등은 더욱 증폭될 것이라는 전망마저 나오고 있다.


그리하여 이처럼 국제질서 변화를 초래하고 있으며 향후 더욱 증폭될 것으로 전망되는 美中 갈등 국면에서, 중화민족주의를 강조하는 영화 <엽문 4 : 더 파이널>이 - 영화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 미국에 대한 중국의 입장을 세계 인민들에게 고하는 대륙의 별 '오성홍기'의 격문처럼 읽힌다면 지나친 정치적 해석일까? 하지만 나는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인 태도인 것이다' 라는 조지 오웰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게다가 전 지구적 변화를 촉발하는 그 방향성이, 이미 평평해진 세상 위에서 '민족과 인종과 종교를 방패 삼아' 더욱 치명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새로운 부족주의로의 회귀'이고, 그런 흐름 속에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다시 삶의 주제가 되는 암울한 세상이 다가오는 듯한 예감마저 들지 않는가?     


G2에 대한 이야기가 길었다. 너무 멀리 왔다. 다시 돌아가자. 전 지구적으로 팬데믹이 기세를 떨치고 있는 가운데 찾은 극장은 한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견자단 엽문 시리즈’의 마지막을 함께 하려는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극장을 찾은 ‘엽문 진성 관객’과 함께 어둡고 텅 빈 상영관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당신의 패권은 순전히 증오와 편견”이라는 대사를 들으면서, ‘잘 가요! 엽 사부’의 아름답고 영화적인 노스탤지어는 머리 속에서 사라지고 G2가 갑자기 불쑥 떠오른 것은 순전히 코로나19 팬데믹 때문이리라.

 

그리고 또 다른 생각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한국에서의 홍콩영화, 즉 검술영화와 홍콩 반환 이전의 홍콩 느와르. 그런데 1997년 이후의 홍콩영화는 무엇이었는지 내가 잘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무간도는 생각이 났다. 내가 너무 과문한 탓인가?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을 먹으며 한번 살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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