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념

탁월성

by 엡실론

"둘이 잘 어울리더라." 친구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굳이 했어야 할까 싶은 말이 튀어나왔다. "근데 잘 어울리는 게 뭔데?" 내 대답에 친구는 당황한 듯했다. 아니, 벤치에 나란히 앉아있을 때 나는 상대의 얼굴을 보지 않는 편이다. 실제로 당황했는지는 모른다. 대답이 멈칫한 순간은 한심한 질문을 하는 나를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나 고민한 시간일지도.

아무튼 그 찰나를 기다리지 못한 나는 또 말을 보탰다. "아니 뭐 그렇잖아. 어울리는 성격은 있다고 쳐도 보통 남의 성격 잘 모르고도 이런 말을 하니까. 연예인 커플 보고도 그런 소리 하고. 그럼 외모만 보고 어울린다는 건데 그게 뭐냐는 거지. 급이 안 맞는다는 거야 뭐야. 서로 안 어울리는 외모도 있나."

친구는 맞은편 벤치를 가리켰다. 사람 대신 고양이 한 마리가 머리를 괴고 엎드려 있었다. 윤기가 사라진 검회색 털, 반쯤 감긴 무거운 눈꺼풀, 노쇠하고 권태로운 표정. 그 위로 오후의 햇살이 내리쬐었고 바람은 선선했다. "뭔가 잘 어울리지 않아?" 나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문현답이었다.

나는 하나를 알면 열을 아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 뒤로도 비슷한 의문들이 이어졌다. 너 운전 잘하잖아 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잘한다는 게 뭐지. 프로 레이서도 아닌데. 그렇다고 내가 못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경력이 쌓이면 다들 잘하게 된다는 생각도 아니었고.

운전, 공부, 운동, 요리, 게임 등 잘한다는 말을 붙일 수 있는 모든 행위는 명시적인 요소와 암묵적인 요소로 분리된다. 운전을 예로 들면 교차로에서 자기 차선을 잘 따라가는 것. 급출발, 급정지를 하지 않는 것은 명시지(explicit knowlege)다. 평가하기도 쉽고 가르치기도 쉽다. 동시에 암묵지(tacit knowlege)도 존재한다. 도로의 흐름을 잘 읽는다. 센스가 좋다. 정도의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명시적인 부분과 암묵적인 부분이 모두 뛰어날 때 우리는 잘한다, 탁월하다고 말한다. 서울대에 진학하고
소년등과하는 것,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되는 것, 유명 아티스트가 되는 것까지 무엇 하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특히 암묵지 때문에 누구나 탁월하기는 어렵다. 명시지는 익히고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알려줄 수 없는 암묵지를 스스로 깨치는 단계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 고비를 넘어가지 못하면 탁월함의 영역에는 도달할 수 없다. 왕도가 없다는 말도 암묵지의 존재 때문에 생겼을 것이다. 정공법이 없다. 암묵지는 그래서 재능의 영역으로 치환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체능은 재능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공부도 재능이라는 말이 있지만 예체능보다는 덜한 느낌이다. 공부가 진짜 예체능보다 쉬울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암묵지에 대한 이해도 차이 때문에 재능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다. 마술은 모르고 보면 마법 같다.

이런 인식이 생긴 원인은 대다수가 예체능과 접점이 없는 삶을 살아서다. 업계 종사자들에게는 기술적인 부분. 즉, 명시지인 것도 일반인들은 모르니까 암묵지로 받아들인다. 공부는 잘하든 못하든 누구나 좀 해봤기에 암묵지 비중이 상대적으로 적다. 그나마 쉬워 보일 뿐이다. 공부를 잘하는 집단에 있으면 전문직 정도는 탁월하다고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조차 운동이나 음악은 타고나야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할 것이다.

많은 탁월한 사람들이 자신의 성취를 누구나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이 꼭 겸손이나 기만은 아닐 것이다. 재능은 중요한 요소지만, 목표를 위해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과 금방 포기한 사람들이 유독 재능 탓을 많이 한다. 재능의 유무는 암묵지의 난관을 쉽게 넘어가느냐 어렵게 넘어가느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의 문제라고 믿는다. 물론 전성기는 짧고 인생을 언제까지나 갈아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실상 불능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얼마 전 학생들 면접을 도와줬다. 개선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 끄집어내는 작업은 즐거웠다. 동시에, 타고난 게 아닐까 싶은 애들을 보면 우울했다. 내가 타고나지 못한 게 억울해서가 아니라 나의 분석력이 아직 이것밖에 안 되나 싶어서.


수영장 바닥에서 물로 점프해서 뛰어드는 훈련을 먼저 해요. 이걸 100번 해서 익숙해지면 그 다음에 1m 다이빙대에 올라가는 거죠. 거기서 또 100번 합니다. 처음에는 1m도 굉장히 무서워요. 너무 무서워서 적응이 안 되면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고, 또 훈련해서 올라가고 하는 식이에요. 그렇게 높이를 올리는 거죠. 올림픽 종목이 플랫폼 10m가 있잖아요? 플랫폼도 1m에서 시작해서 3m, 5m, 7.5m, 10m 이렇게 단계별로 갑니다. 처음 1m에서 5m까지 가는 게 정말 힘들어요.

- 광주시 체육회 다이빙팀 고병진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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