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념

환상은 모순을 허용하지 않는다

by 엡실론

세상엔 불운이 넘치지만 불운의 손길이 나에게 닿기 전까지는 체감하지 못한다. 매일 질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지만 내가 병에 걸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교통사고도, 범죄도 마찬가지다. 희생자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지언데 그 대상이 나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오지 않는 물건을 2주나 기다리면서도 이것이 사기만은 아니길 바랐다. 사기를 예방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사기일 수가 없었다. 번호 검색도, 계좌번호 조회도, 판매 이력, 글 쓴 이력까지 전부 확인했고 판매자랑 통화까지 했으니까. 하지만 가용 정보를 전부 활용해도 내 주식은 떨어지고, 당할 사기는 당한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그제서야 느낀다.

다행히 돈은 되찾았지만 사기의 기억은 여전히 내 삶에 영향을 미친다. 이후 여러 번의 중고거래가 성공적으로 끝났음에도 그렇다. 고작 10번 중에 1번 당했을 뿐인데 빌어먹을 저신뢰 사회라는 망상까지 든다. 과학적 사고는 본능에 반하는 일이다. 한 번 누군가에게 배신당했다고 사람 자체를 믿지 못하게 되거나, 한 번의 실패가 인생의 발목을 잡는 것도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사기를 막을 수 있었을까. 그때 당시는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지금이라고 뭔가 더 해볼 게 있지는 않다. 다만 의심되는 지점들은 분명히 있었다. 구체적이지 않은 판매자 대답을 나의 상상이 메꿨을 뿐이다. 해외에서 직구한다니까 가격이 싸겠지, 공동으로 하니까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들. 새 제품을 몇만 원 싸게 사서 쓴다는 기분 좋은 환상 속에서 모든 모순은 사라졌다.

과학적 사고라는 것은 환상을 부수는 과정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믿는 것이 있다. 연구자들조차 실험을 했을 때 나오길 바라는 기댓값을 가지고 있다. 모순되는 결과를 마주했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가 과학자와 비과학자를 나눈다. 환상 속에 살면 모순 없는 세상을 살게 된다. 세상이 너무나 명명백백하고 뻔해 보인다면 환상 속에 살고 있을 확률이 높다.

백신이 위험하다는 종교적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과학적 검증은 무의미하다. 지금 안전해도 10년 뒤에 신체에 어떤 영향이 있을지 모른다. 광우병도, 식품 첨가물도 그렇다. 안전하다는 과학적 검증 결과들, 자신의 생각과 모순되는 결과들은 전부 환상으로 지워버리면 그만이다. 10년 뒤에 안전해? 그러면 50년 뒤는 어떤데? 이들에게 백신, 광우병, 식품첨가물은 영원한 악이다.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산주의의 환상에 빠졌던 자들에게 그 체제는 모순이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였다. 한번 선악을 정해놓고 나면 환상의 나라에서 살게 된다. 그 환상은 영원히 깨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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