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잡념

유튜브 시대의 글쓰기

by 엡실론

임시 저장된 글이 10개를 한참 넘었다. 핸드폰 메모장에 적힌 잡문들까지 합하면 개수는 더 늘어난다. 하지만 한동안 쓰지 못했다. 완벽주의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나의 완결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알 수 없는 강박이 있다. 하지만 역시 이건 표면적인 문제인 듯하다. 여태껏 같은 강박을 갖고도 글 쓰는 건 쉬웠으니까. 진짜 문제는 내 스스로 만족할만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메모장에 잠자고 있는 글들은 대부분 트위터에나 올릴 만한 수준이다. 저품질의 1차원적 감상들, 날아다니는 몽상들을 잠시 가둬둔 것뿐이다. 글로 써보려고 하면 금세 막힌다. 피상적인 생각이기에 한 두 문단 정도 순조롭다. 그 이후로는 진행이 어렵다. 취미생활이기에 글을 절대 억지로 쓰고 있지는 않다. 그렇게 하나씩 메모장에 쌓여간다.

하지만 아마 이런 짧은 생각들도 영상으로는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글쓰기야 2시간을 써도 읽는 건 1분 남짓이다. 공을 들이는 것에 비해 허무할 정도로 빨리 끝난다. 영상은 단위 시간당 정보의 양이 글보다 훨씬 떨어진다. 글쓰기는 중언부언하면 금방 티가 나지만, 말하기는 그렇지도 않다. 약간의 변주만으로도 시간을 채울 수 있다. 웬만한 지식 전달 영상은 최소 1.5배속을 해야 그나마 볼만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다.

말로 할 때는 자신의 어설픈 지식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내가 잘 모르는 부분도 유야무야 넘어가기 쉽다. 청자도 그런 부분을 일일이 알아차리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말의 휘발성은 아주 높다. 그래서 TV 토론을 그대로 글로 받아 적으면 모순되거나 이상한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답변을 제대로 안 하고 넘어가는 부분도 많다. 잘된 토론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청자는 물론이고 화자 스스로도 말하는 도중에는 크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글에서는 그런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 여기에 글쓰기의 유익이 있다고 본다. 글을 하나 쓰려면 수차례 퇴고해야 한다. 말처럼 순간적으로 내뱉고 끝나는 성격이 아니다. 한 문장씩 곱씹어 볼 때마다 이건 영 아닌데 싶은 감정과 마주해야 한다. 영상도 찍고 보면 한 쇼트마다 아쉬움이 있겠지만 이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나 책을 보고 느낀 것이 많다고 느낄 땐 글을 써본다. 얼마나 써지는지, 잘 써지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가 온다.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심과 이런저런 테크닉을 모두 배제해도 진도가 안 나간다. 기술적인 부분은 글쓰기의 3할 정도라고 생각한다. 글이 써지지 않는 주된 이유는 콘텐츠 부족이다. 많이 느꼈다 싶은 감정은 문자 그대로 느낌일 뿐이었다. 글을 썼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얄팍함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도 쓴다. 글을 하나 쓰면 얄팍한 생각에도 종이 한 장 정도의 두께감이 더해지는 듯하다. 물론 느낌이다. 막상 어떤 생각이 더해졌는지, 깊어졌는지에 대한 글을 써보면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 다만 나는 전보다 나아진다는 직감을, 종이 한 장의 두께를 간과하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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