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내가 예전에 쓴 글을 읽어 본다. 덜 다듬어졌다는 느낌은 들지만 본질적인 내용에는 여전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10여 년 동안 나의 근본은 변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는 셈이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본질적으로 같다는 것은 신기한 한편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변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기에.
과거의 나를 마주하며 드는 또 다른 생각은 지금까지 쓴 모든 글과 반대되는 내용으로도 글을 쓸 수도 있겠다는 것이다. 딴지를 걸 부분도 많고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틀렸다'고 할 만한 부분들도 있다. 내 글은 늘 확신에 가득 차있어서 취약점이 많은 편이다.
실제로 내가 100% 믿는 부분은 많지 않다. 이런저런 면들을 생각한 뒤 하나의 입장을 택해 밀고 나갈 뿐이다. 매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습니다 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믿는다. 치킨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행동이나 말을 반반으로 할 수는 없다. 애매한 얘기를 늘어놓는 일은 정치인들이나 하는 것이다.
어쨌든 결국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은 결과론적인 한쪽 면뿐이다. 내가 고민했던 49%의 의심은 사라진다. 51% 득표율로 당선이 되면 나머지 49%는 사표가 되듯이.
그래서 내가 보는 남과 남이 보는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극단으로 비친다. 그런 인간을 지지한다고? 이 시국에 그런 행동을 한다고? 단단히 미쳤구나. 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실제로 정신이 나간 사람도 있을 거다. 하지만 미쳐서 선택한 것과 1%의 나음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같은 범주로 묶인다. 51% 믿는다는 것은 양자택일의 순간에선 결국 100% 믿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의 선택을 확신이라고 짐작하는 이유는 뭘까. 다른 사람이 광신도일 거라고 믿는 이유는 뭘까. 아마 그건 본인이 광적으로 무언가를 믿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특정 종교에 광적으로 집착하게 되면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전부 이단(異端)으로 보인다. 종교가 꼭 신을 믿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종교의 이름을 빌려 전쟁이 일어난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부동산 정책에 관한 글을 좀 쓰다가 관뒀다. 이미 말이 많은 곳이다. 굳이 말을 하나 더 보탤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정책도 마찬가지다. 이유를 알고 나면 사람은 좀 더 너그러워진다. 이유를 안다는 것은 이해한다는 것이고, 타인의 49%를 들여다본다는 뜻이다. 사연을 들으면 쉽게 비난하기 어려운 살인도 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을 정죄할 마음이 사라지느냐는 다른 차원의 얘기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