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모주를 먹였지

재미있지만 눈물 나는 이야기

by 최오도



1. “밭에 할 일이 산처럼 많던 날, 때 아닌 가을비가 내렸지. 비 덕분에 눈치 안보고 집에서 좀 쉬나 했는데, 집에도 할 일이 많아. 올망졸망한 아이들 다섯이 내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지질 않아. 근데 그날따라 하, 세상 일이 다 귀찮고, 그냥 쉬고 싶었지.


시아버지 마시던 모주 한 사발 가져다가 아이들 입에 한 숟가락씩 떠 먹였더니 새끼 새처럼 포르륵 거리던 것들이 금세 자는 거야. 남은 모주는 내가 한숨에 마셨지. 툇마루에 앉아서 처마 아래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그렇게 맘이 좋을 수가 없더라. 그때 내 나이 겨우 서른이 넘었을 때였다. 아홉 식구 밥 수발에, 집안일에, 밭일에 새벽부터 잘 때까지 쉴 틈이 없던 시절이었지”


얼마 전 모주 한 사발을 앞에 놓고 친구가 들려준 그녀의 엄마 이야기. 그녀는 힘든 일 앞에서, 엄마의 모주 이야기를 생각하는데, 그러면 이까짓 것, 하는 생각에 힘이 났다고 했다. 이제 팔순이 넘은 그녀의 엄마는 지금도 가끔 모주를 마신다고 한다.



2. 서른둘에 과부가 된 후배의 엄마는 재혼도, 연애도 안하고 평생 두 딸과 살았다. 엄마 나이 마흔 즈음, 큰 키의 다정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엄마의 연애를 알게 된 두 딸은 며칠을 울고 불며 밥도 안 먹고 학교에도 가지 않았다. 엄마가 그 남자를 더 이상 보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자, 딸들은 밥을 먹고 학교에 갔다. 그리고 엄마는 딸들과의 약속을 지키며 평생을 혼자 지냈다. 이제 그 엄마는 육십이 넘었고 그녀의 막내딸은 마흔이 되었다.


“그 때 내가 철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그 때의 엄마 나이가 되고 보니, 마흔이 그렇게 많은 나이가 아닌 거예요. 여전히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은 욕망 덩어리인걸. 엄마에게도 욕망이 있다는, 이 당연한 것을 왜 그때는 몰랐을까”


후배는 엄마의 착한 딸이자, 연인이고 남편이었다. 그녀는 엄마가 사라져 버릴까봐 더 열심히 공부했고 더 좋은 학교, 더 좋은 회사에 들어갔다. 엄마를 외롭게 할까봐 변변한 연애도 한번 하지 않으며, 엄마를 대신해서 달려온 그녀의 삶. 그럼에도 그녀는 엄마에게 언제나 미안하단다. 그녀의 엄마가 조금 더 이기적이고, 용감했더라면, 두 여자의 삶은 지금과 많이 달랐을까? 깊은 가을에, 엄마와 늦은 휴가를 떠날 거라는 후배의 하얀 얼굴에 그녀 엄마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3. 얼마 전 택시를 타고 청와대 앞을 지나가는데, 고향이 영광이라는 택시기사가 청와대 앞을 차로 쌩쌩 달리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며,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꺼냈다.


“열여덟에 혼자 서울로 왔어요. 줄줄이 동생들과 홀어머니 남겨두고 서울로 무작정 올라왔는데 정말 세상 막막하고 얼마나 무섭던지. 그래도 서울오니 넓고 구경할 것도 많아 참 좋아. 어느 날 동대문운동장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무슨 연설을 한다고 해. 서울 왔으니 대통령 얼굴도 보는구나 하면서 구경을 갔는데 운동장 앞에 경찰들이 쫙 깔려서 사람들 가방을 막 뒤지는 거야. 근데 하필 그 때 서울 올 때 엄니가 한말이 왜 생각이 났는지. 엄니가 서울 가면 ‘사람들 조심해라. 코 베어 간다.’그랬는데 그 말이 생각나니 털컥 겁이 나는 거야. 뭐가 겁나는지도 모르게 그냥 겁시나. 그래서 무조건 뒤로 돌아 도망을 치는데, 얼마 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경찰들에 잡혀 버렸지. 대통령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경찰서에 끌려가 죽도록 맞았어요. 왜 도망갔는지 불으라는데, 이유를 댈 수가 없어. 코 베어 갈까봐 도망갔다고 해도 믿지를 않아. 밤새도록 맞다가 아침에 풀려났는데, 아 지금 생각해도 내가 왜 도망쳤는지 알 수가 없어”


택시 기사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아, 내려야 할 곳에서 내려달라고 못하고 몇 백 미터를 더 가서 내렸다. 택시기가는 웃으며 이야기 했지만, 지난 세월이 얼마나 팍팍했을까,를 생각했다.


지나간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도 웃으면서 말할 수가 있다. 그래서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가 진주조개 속 진주 같아 더 아플 때가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채집해서 목걸이처럼 엮고 싶다.


“가끔은 멋진 일이 생기고 난 직후에 삶을 되돌아보면, 인생에서 운이 좋았던 일들이 산맥으로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일이 생긴 후에 되돌아보면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다. 현재가 과거를 재배치하는 것이다. 삶은 온갖 사연으로 가득한 은하수 같은 것이고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그때그때 몇 개의 성운을 고를 수 있을 뿐이다”(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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