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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Feb 06. 2021

미국 여자들의 글쓰기 워크숍에서 배운 것

마음 알아차림의  훈련

일리노이주 시골 농가주택에서 열린 글쓰기 워크숍에 참석한 적이 있다.  


초여름 아침, 나무 테이블에 둘러앉은 십여 명의 여자들 중 영어를 모국어로 쓰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심장이 소녀처럼 콩닥콩닥 뛰었다. 미국 생활은  ‘빨간 머리 앤'처럼 사고 치고 좌절하기 일수였지만, 그녀처럼 자유롭고, 호기심이 폭발하던 명랑한 시절이기도 했다. 글쓰기 워크숍에 가보라고 내 등을  떠민 것도 내 안의  그 빨간 머리 소녀였을 것이다.


워크숍을 주관했던 메리가 나를 친구라고 소개해주는 게 기뻤던 것 같다. 메리를, 나는 메노나이트 교회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다. 한눈에 반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하회탈 같은 주름을 만들며, 살짝 갈라진 앞니를 드러내고 웃는 그녀. 그녀는 지역신문에 자연 속 삶에 관한 칼럼을 쓰는 꽤 유명한 에세이스트이고, 일리노이주 주립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했다.


간단한 이름과 참여 동기를 말하던 중에 생각지도 못했던 고백을 하게 되었다.  외국어를 쓴다는 것은 많은 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을 의미했지만 반면에 단순하고 치장 없이 말할 수 있어 좋았다. 치장 없는 말속에 더 많은 진심이 담긴다는 것을 그때 배운 것 같다. 그날도 한국에서라면 하지 못할 고백이 인사말 중에 튀어나왔다.   


“어릴 때부터 방바닥에 엎드려 글 쓰는 것을 좋아했어요. 소설가가 되는 꿈을 꾸기도 했는데 육아가 시작되고부터 일기도 제대로 쓰지 못했죠. 퇴근하고 집에 와서 아이를 씻겨 먹이고 재우고 나면, 책상 앞에 앉을 에너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거예요.”


진짜 그랬다. 일과 양육 사이에 꿈이 자리할 틈은 없었다.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오래 갇혀있던 내 안의 말들이 문을 두드리듯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메리가 주관하는 글쓰기 워크숍 광고를 보고 무슨 계시를 받은 느낌이 들었었다. 문학을 가르치는 메리와 친구가 된 일, 그녀가 여자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들이 글쓰기로 열린 황금 문처럼 느껴졌다


"글을 쓰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부터 시작해도 늦은 것은 아닐까요?"


한국에서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낯 간지러운 고백이 막 튀어나왔다. 그전까지 누구에게도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을 말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날 갑자기 툭 그런 고백을 하게 된 것이다. 나의 고백에 테이블을 둘러앉은 여자들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나도 그랬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점심을 먹고 한 시간의 산책과 한 시간의 글쓰기 자유시간이 주워졌다. 산책하는 동안 떠오른 상념을 다듬으려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 적는 것이 미션이었다. 글_쓰기 대신 마음_ 쓰기를 하라는 이야기 같았다. 언어는 생각을 전달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고, 쓰기가 생각에 앞서지 않도록, 글이 생각을 따라가도록 해야 한다고.. 알쏭달쏭하지만 어쩐지 알 것도 같은 것을 메리는 강조했다.


그런 식의 글쓰기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일단 메리가 안내하는 대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옮겨 적고자 노력했다.


초여름의 농가주택의 정원에는 한참 색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워크숍에 참가하고 있는 여자들의 나이,  피부색과 눈동자, 머리카락의 색만큼이나 다양했다. 나의 머릿속에서도 온갖 컬러풀한 생각들이 부풀고 사그라들었다.  나는 영어로 쓰기를 포기하고 한글로 떠오르는 상념들을 적어 나갔다. 그때 쓴 문장들을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아름다움에 대해 썼던 그 느낌은 남아있다. 초여름, 벌과 나비, 꽃들이 만발한 정원 산책이 주는 시적인 느낌에 대해서 썼던 것 같다.


자유시간을 마치고 각자 쓴 글을 낭독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메리는 낭독되는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마음의 울림을 글로 표현했다는 그 사실에 주목하라고 말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한글로 쓰여진 에세이를 읽어나갔다. 당연히 참가자 중 누구도 나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적어도 그 부엌에서 나의 언어는 주술사의 주문 같은, 소리 자체로 ‘이해’되는 언어였다.  설명할 수 없는 자유로움이 벅차게 부풀어 올랐다. 청자들이 내 언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느낌. 언어가 아닌 몸과 마음으로 통하는 느낌. 그 느낌 안에서 큰 자유와 희열이 느껴졌다. 글쓰기에 치유의 힘이 있다고 하는 이유를 아주 조금 맛보았다고 해야 할까?


낭독이 끝난 뒤, 여인들은 내 목소리의 톤과 리듬이 주는 느낌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글을 쓰는 동안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왜 그런 느낌을 갖게 되었는지 궁금해했다. 그런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대화가 계속될 수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글쓰기의 본질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워크숍의 경험이 중요했던 것은 내가 쓴 글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이래로 써온 수많은 글들은 대부분 무언가를 목적하는 것들이었다. 논문이나 보고서, 백일장의 글짓기나 독후감까지 누군가의 평가를 위해 쥐어짜듯 생각을 만들어 낸 것들이었고, 심지어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수많은 계획과 채근, 자책의 글들을 채워오지 않았던가?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마음 알아차림에 왜 글쓰기가 도움이 되는지,  그런 글쓰기가 가능한 것인지,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후에 무언가를 끄적일 때면  메리의  글쓰기 워크숍을 떠올린다. 에세이를 낭독할 때 느꼈던 자유와 희열이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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