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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오도 Jun 03. 2020

천만번의 인사

광화문 달

퇴근길, 을지로 3가부터 종로를 거쳐 안국동,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역까지 40여분을 걷는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그저 걷기 위해 걷는다. 온종일 한자리에 붙박이로 앉아 있었던 내 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로서 가능한 멀리 걸어가 지하철을 타려고 한다.

걷다 보면 보지 못하고 스쳐갔던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달이 어느 날 새롭게  발견되었다..


광화문 앞을 지나는데, 헤드라이트 불빛과는 다른 환함이 느껴져 무심결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와, 하고 탄성을 지를 만큼 커다란, 글자 그대로 ‘쟁반처럼 둥근달’이 거기 있었다.


광화문 광장 양쪽으로 백색 빛을 내뿜는 거대한 빌딩들, 퇴근길을 재촉하는 자동차들의 끝없는 질주 행렬 같은 도시의 사나움 속에 휘영청 떠있는 둥근달이라니.. 도시의 밤과 달의 조합은 마치 등산복에 걸친 진주 목걸이처럼 엉뚱하게 보였다. 달이 커서 더욱더 그렇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도시의 형형한 불빛 사이에서 우윳빛 달빛은 그저 무용한 존재로 느껴졌다.


달빛에 기대어 길을 찾고, 가족의 안부를 구하고, 사랑을 맹서 하던 달의 호시절. 이제 옛 이야기가 되버린 그 호시절을 광화문의 달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을까? 달빛 가득한 운동장에서 슥슥 자전거 페달을 밟던 내 엄마의 젊은 날도, 대보름달에게 빌던 어린 시절 나의 소망도 그 기억 안에 들어 있을까?


그날 이후 광화문 광장을 지날 때마다 나는 잠시 멈춰 달을 바라본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을 보듯 반갑고 애틋하게... 그리고, 이런 기도하는 마음 같은 걸 가져본다.


천만이 산다는 이 도시의 사람들이 더도 말고 하루 한 번만,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아깝게 쏟아지는 저 달빛을 바라봐 주기를.. 그런 삶의 틈이 생기기를.. 그래서 저 달이 천만번의 밤 인사를 받으며 더 환하게 빛날 수 있기를... 그렇게 된다면, 달빛은 저와 같이 무용하게 낭비될리 없을 테고, 그리고, 우리도, 달도 조금은 더 괜찮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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