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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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딩노트'라는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샐러리맨으로 42년을 근무한 주인공 스나다는 이제 은퇴를 하여 제2의 인생을 막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스나다는 뜻밖의 위암 말기의 진단을 받고, 인생 최후의 프로젝트로서 엔딩노트를 쓴다. 노트에는 이런 게 담긴다. 그동안 해보지 않은 것들을 해보기, 일테면 평생에 처음으로 야당에 투표하기, 종교를 바꾸기,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같은. 꼼꼼한 샐러리맨답게 장례식에 초대할 사람들의 명단과 자신의 예적금 통장과 신용카드의 처리 방침도 정하여 자세히 기록해둔다. 이 모든 과정을 스나다의 막내딸은 카메라를 들이대고 기록한다. 차분하고 정갈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스나다와 그의 가족들 사이엔 늘 웃음꽃이 핀다. 스나다 덕분이다.
스나다가 죽기 3일 전, 스나다는 아들을 불러 자신이 작성한 장례식 참석자 명단을 읽게 하고 궁금한 것이 없는지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아들, 장례식 하다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내게 전화해" 죽음을 앞두고 생기와 웃음의 여유를 잃지 않으며 행복했다고 말하는 스나다. 죽음을 담담히 준비하는 스나다와 그의 가족들을 따라가다 보면 '아, 저렇게 죽음을 맞는다면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 생각 끝에 돌아가신 엄마를 떠올렸다. 죽음에 대해 무지하여 엄마를 쓸쓸하게 보내드렸다.
철학자 강신주는 죽음을 나의 죽음, 너의 죽음, 그의 죽음의 세 종류로 구분하고 이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너의 죽음이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나의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지만, 사실 나의 죽음 뒤에 고통은 고스란히 나를 사랑하던 사람들의 몫이지 나의 몫은 아니다. 그의 죽음이란 우리에게 어쩌면 의미가 없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전쟁으로, 기아로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의 눈망울 앞에 무심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그의 죽음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의 죽음 앞에 무너진다. 절절히 사랑하고, 영원히 같이 있고 싶어 하는 것들의 죽음. 어떤 이들에게 애완견의 죽음은 너의 죽음이어서 필리핀에서 헤리케인으로 수천 명이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보다 천배는 더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유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당연히 '너의 죽음'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조차 제대로 너의 죽음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죽음 앞에 통곡하고, 때때로 사무치게 그리워 가슴을 치는 것은 엄마의 죽음을 온전히 '너의 죽음'으로 맞이하지 못하였던 것 때문은 아닌지.... 엄마를 떠나보낸 뒤 내가 엄마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다. 엄마에 대하여 내가 알지 못하는 이유는 엄마의 '엄마가 아닌 삶'에 대해서 한 번도 제대로 궁금해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너의 죽음 앞에 통곡하기 전에 너의 삶부터 온몸을 던져 끌어안을 일이다. 그래서, 난 '엔딩 노트'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삶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엔딩노트'는 우리의 등을 토닥이며 귀띔해 준다. '너의 죽음' 혹은 '너의 삶'을 너무 늦기 전에 꼭 껴안아 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