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풍경
매주 토요일, 고양시 행신동 햇빛마을 골목에 장터가 선다. 시골 5일장처럼 시끌벅적하다. 나는 굳이 살 것이 없어도 구경 삼에 꼭 한 번씩 둘러보곤 한다. 소소한 물건들을 구경하는 맛도 좋지만, 무엇보다 사람들 구경이 즐겁다. 사람을 주눅 들게 하지 않는 착한 가격의 물건들 사이에서 순해진 얼굴의 사람들을 보는 것이 좋다. 도시 생활자의 무표정한 얼굴이 아닌, “뭐 살만한 거 없을까”, 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자다 일어난 부스스한 머리 그대로 어슬렁거리며, 떡볶이나 멸치국수를 사 먹는 얼굴들이 얼마나 순해 보이는지.
채소와 과일을 파는 천막의 손님 부르는 소리는 유난히 크다. ‘아무거나 골라 3개에 5천 원’하는 채소를 파는 장사 덕분에 주말 밥상의 고민이 쉽게 해결된다. “가을 아욱, 지금 밖에 못 먹는 거 알죠?” 이러면, 그냥 믿고 아욱 한단을 사면된다.
고구마를 살까, 말까 고민하는 중에 장터의 막내로 불리는 갸름한 얼굴의 청년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군고구마 한 개를 내민다. 옆에서 할머니가 “나는 고구마 왜 안 줘?”하니까, 싹싹한 청년은 “어머니도 드려야죠.” 하면서 더 큰 군고구마 하나를 꺼내 할머니에게 내민다. 할머니는 호기롭게 집으로 고구마 한 상자를 주문한다. “앗, 어머니 몇 호였지? 자꾸 어머니 홋수를 까먹네.”고구마 상자 위에 매직으로 할머니 집주소가 적히고, 나의 장바구니에는 시금치, 아욱, 콩나물, 고구마가 한 봉지씩 담긴다. 주말장터 덕분에 가끔씩은 다듬고, 삶고, 무쳐서 집 밥을 해 먹게 된다.
이번 주에는 트랜스포머처럼 생긴 푸드 트럭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푸드 트럭에서는 주로 스테이크를 굽거나 닭을 튀긴다. 푸드 트럭에는 키오스크도 설치되어 있다. 앞으로 주말 장터의 모습도 많이 달라질 것 같다. 이불가게 아주머니가 “오늘은 멋지시네요”, 하면서 인사를 건넨다. 아침에 외출했다가 들어가는 길이라 옷차림이 평소와 다르게 보였나 보다.
길 건너 장터 한쪽으로 여자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다. 여자들 서넛이 진짜 놀랍다는 듯이 “이거 대박, 진짜 예뻐, 언니들이 안사면 내가 사간다”, 이러면서 차가운 날씨도 아랑곳하지 않고 맨발로 여름 샌들을 신어 본다. 그리고 정말 신발을 열 켤레쯤 비닐 백에 담고 있다. “이 메이커 하나에 몇십만 원 하는데.. 오늘 완전 거제네. 어제 꿈을 잘 꾼 거지. 삼 만원이면 거저야.” 옆에서 함박웃음을 한 키 큰 이가 신발 장수인 듯한데, 뒷짐만 지고 여자들 하는 대로 내버려 둔다.
꿈을 잘 꾼 사람은 신발 장수인 듯하다. 물건이 ‘대박’ 임을 알아본 여자들이 동네 친구들을 다 불러 ‘아도’를 쳐 가는 분위기다. 공연히 나도 내 사이즈의 블랙 스니커즈를 하나 챙긴다. 신어보니 딱, 예쁘다. 지나가던 할머니들, 옆에서 다른 물건을 팔던 상인들도 한 번씩 고개를 쑥 빼고 무슨 ‘대박’인가 살핀다. 순식간에 아주 작거나, 무지 큰 사이즈만 빼고는 완판! 그 사이 나도, 블랙 스니커즈는 이미 신고 있고 손에는 같은 디자인의 흰색 스니커즈가 더 들려있다. 현금이 없다는 손님을 위해 여자 손님 한 명이 멀뚱하게 서있는 신발장수에게 계좌번호를 부르라고 하더니 박스 뚜껑에 크게 매직으로 적는다. 낯 모르는 이들끼리 신발을 골라주고 예쁜지 묻는다. 장터에서 사람들은 정말 순해지는 것 같다.
얼떨결에 사게 된 스니커즈 두 켤레. 집에 와서 정신 차리고 신어 보아도 맘에 들고 예쁘다. 겨울지나 봄까지, 새 스니커즈 신고 더 많이 산책을 다녀야지, 순한 얼굴의 사람들을 더 자주 만나야지, 생각했다.